《한국은행이 8월부터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모의실험에 나선다.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전자화폐인 CBDC와 관련한 한은의 첫 행보다. 10일 진행된 모의실험 설명회에는 30여 개 기업이 참여해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한은은 연말까지 ‘공공 클라우드’ 가상공간에서 참여 기업과 함께 CBDC 발행, 유통, 환수 등에 대한 실험을 마칠 계획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비대면 결제 및 금융거래가 빠르게 늘어나면서 CBDC를 둘러싼 세계 각국의 발걸음도 더욱 빨라지고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전 세계 중앙은행의 86%가 CBDC 관련 연구와 개발, 실험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이달 11일 한은 창립 71주년 기념사에서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CBDC 도입 필요성이 더욱 커질 수 있는 만큼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며 “CBDC 모의실험에 착수해 기능과 활용성을 차질 없이 테스트해 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BIS는 최근 금융을 현대화하고 정보기술(IT) 기업의 통화 지배를 예방하려면 CBDC가 필요하다고 했다.》
○ 카카오 등 참여 국내 첫 CBDC 모의실험
CBDC는 중앙은행만 발행할 수 있고 액면가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의 가상화폐와는 다르다. 가상화폐는 누구나 발행할 수 있고 수요와 공급에 의해 가치가 달라진다. 가상화폐의 핵심 기술인 ‘분산원장 기술’이 적용된다는 점만 같다. 분산원장은 거래 정보가 기록된 원장을 특정 기관의 중앙 서버가 아니라 공유 네트워크에 분산해 참가자들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기술이다.
한은의 첫 모의실험에는 네이버, 카카오 등 국내 빅테크(대형 기술기업)가 대거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 두 회사는 자회사를 통해 다음 달 12일 마감되는 입찰에 나설 예정이다. 네이버 자회사인 라인 관계자는 “앞서 한은의 CBDC 파일럿 시스템 컨설팅 용역에 참여한 적이 있고, 아시아 등 다양한 지역의 중앙은행과 CBDC 플랫폼에 대해 논의하며 기술 개발 역량을 강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삼성SDS, LG CNS 등 국내 IT 서비스 기업은 물론이고 일부 시중은행도 입찰에 참여할 것으로 관측된다.
CBDC 모의실험에 참여하면 ‘정부 사업 수행자’로서 기술력을 인정받고 기술 활용도도 높일 수 있어 기업들의 관심이 뜨거운 것으로 풀이된다. IT 업계 관계자는 “국내 CBDC 첫 실험을 수행했다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에 빅테크엔 놓칠 수 없는 기회”라고 말했다.
○ 바하마는 이미 CBDC 사용 가능
세계 주요국 가운데 CBDC 발행에 가장 적극적인 곳은 중국이다. 중국은 지난해부터 수도 베이징 등에서 일반 시민에게 ‘디지털 위안화’를 나눠주고 사용하도록 하는 시범 운영을 하고 있다. 올해 3월 청두에선 4000만 위안(약 68억6000만 원)어치를 나눠받은 20만 명이 온·오프라인 매장 1만여 곳에서 실제 CBDC를 사용했다. 내년 2월 열리는 베이징 겨울올림픽에선 외국인들이 디지털 위안화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현금 사용이 급격히 감소하고 있는 스웨덴 역시 지난해 2월부터 유럽 최초로 CBDC 발행 및 사용법을 점검하기 위한 시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스웨덴 중앙은행이 CBDC를 발행하고 참여 기관들이 이를 가상 환경에서 유통시키는 1단계 테스트를 최근 마쳤다. 2단계에선 처리 속도 개선, 오프라인 지급 기능 구현 등을 중심으로 테스트를 실시할 방침이다.
미국은 CBDC 도입을 서두르지 않겠다는 방침을 내놨다. 하지만 올해 3분기(7∼9월) 중 미국 보스턴 연방준비은행은 매사추세츠공대(MIT)와 함께 개발 중인 두 개의 CBDC 프로토타입(시험 제작 원형)을 공개할 예정이다. 또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미국의 CBDC ‘디지털 달러화’ 발행의 잠재적 이익과 리스크를 논의한 보고서도 곧 내놓을 계획이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보고서는 섬세하고 신중한 과정이 될 CBDC의 첫 시작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CBDC를 세계 최초로 도입해 사용하고 있는 곳도 있다. 카리브해의 도서국가 바하마는 지난해 10월 개인이 소액 결제에 사용할 수 있는 CBDC ‘샌드 달러’를 도입했다. 30여 개의 도서 지역으로 이뤄진 바하마는 오프라인 금융 거래가 불편하다는 지리적 특수성 때문에 사상 첫 CBDC 도입이 현실화됐다.
○ “은행 예금 위축 우려” vs “통화정책 효과 높여”
국내에서 단기간에 CBDC가 발행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한은이 현 시점에서 CBDC 발행의 필요성이 크지 않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번 모의실험도 발행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고 선을 긋고 있다. 한은 관계자는 “현금 이용 비중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상황에선 CBDC가 도입돼야 하겠지만 그 상황이 언제 올지 가늠할 수 없다”고 말했다. 국내 지급수단에서 현금 이용 비중은 2019년 기준 26.4%로 2년 전보다 9.7%포인트 감소했지만 여전히 20%가 넘는다. 앞서 이주열 총재도 “CBDC 도입을 결정하려면 기술적 문제뿐 아니라 제도적, 법적 요인도 있기 때문에 시기를 구체적으로 확정하기 어렵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CBDC를 바라보는 금융회사들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CBDC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면 경제주체들이 은행에 돈을 맡기기보다는 CBDC를 보유하게 되면서 은행 예금 위축 등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CBDC 발행 여파로 은행 예금이 크게 감소하면 은행의 자금조달 비용이 올라가고 대출 능력도 떨어질 수 있다”며 “코앞에 닥친 문제는 아니지만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미리 준비해 나가야 할 중요한 문제”라고 했다. 파월 의장은 “CBDC는 현금, 은행 예금의 대체재보다는 보완재로서 이상적으로 기능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CBDC 발행이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효과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신술위 국제금융센터 책임연구원은 “CBDC는 마이너스 금리를 부과할 수 있어 내수를 부양할 때 통화정책의 효과가 더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는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낮춰도 ‘제로(0) 금리’를 보장하는 현금이 있기 때문에 금리 인하 효과에 한계가 있다. 하지만 CBDC를 발행하면 실질적 금리 하한선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코로나19 같은 팬데믹 상황에서 개인에게 직접 CBDC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헬리콥터 머니’ 정책도 손쉽게 시행할 수 있다.
이명활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우리나라도 국제적인 CBDC 논의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CBDC 설계 단계부터 국경을 뛰어넘은 글로벌 상호 운용을 염두에 두고 CBDC 시스템 개발 및 구축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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