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이라는 주홍글씨[김학선의 음악이 있는 순간]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6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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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임재범-이 밤이 지나면

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
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
고정으로 출연하는 라디오에서 임재범의 ‘이 밤이 지나면’을 틀었다. 이 계절에 특히 잘 어울리는 노래다. 하지만 이 노래는 ‘국가 공인’ 표절곡이기도 하다. 가끔 인터넷 게시판에 이 노래 얘기가 나오면 표절곡이라는 댓글이 붙곤 한다. 국가에서 표절이라 확정한 노래를 고르고 트는 데 난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이 밤이 지나면’을 표절로 확정하고 낙인찍은 과정 자체가 국가의 폭력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993년 5월, 당시 공연윤리위원회(공윤)에선 노래 13곡을 표절로 판정했다. 임재범의 ‘이 밤이 지나면’을 비롯해 신성우의 ‘내일을 향해’, 신승훈의 ‘날 울리지 마’, 양준일의 ‘리베카’, 변진섭의 ‘로라’ 같은 당대 최고 인기곡이 우수수 표절로 확정됐다. 정부 기관의 권위는 대단해서 이후 이 노래들은 더 이상 항변할 수도 없는 ‘공인 표절곡’이 되었다. 지금도 일부 누리꾼이 인터넷 게시판에 자신 있게 표절곡이라 말할 수 있는 건 국가 공인이라는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근거의 바탕은 너무나 빈약하다.

친고죄에 해당하는 표절 여부를 국가가 나서서 결정짓겠다는 것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 표절 대상이 된 노래들의 원작자 누구도 고소하지 않았지만 국가가 대신 단죄하겠다며 여론몰이를 했다. 과정은 더 졸속이었다. 최근 가요계 표절 논란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박진영과 김신일의 법정 공방이 있다. 자신의 노래를 표절했다며 김신일이 박진영을 고소한 이 사건은 4년간 법정 공방을 펼치다 법원의 화해 권고로 마무리됐다.

4년이라는 숫자가 눈에 띈다. 한 노래의 표절 여부를 가리기 위해 두 아티스트는 오랜 기간 서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며 말 그대로 공방을 벌였다. 하지만 1993년 공윤의 표절 판정에는 이런 과정이 없었다. 표절 여부를 가리기 위한 기간이 얼마였는지, 누가 심의했는지, 근거는 무엇이었는지, 작곡가의 소명 기회는 있었는지 어떤 것도 알려지지 않았다. 잼의 ‘난 멈추지 않는다’는 표절로 확정됐다가 가수 측에서 법적 대응을 시사하며 강하게 반발하자 표절 판정을 취소하기도 했다. 촌극의 연속이었다.

임재범의 ‘이 밤이 지나면’은 폴 영의 ‘Everytime You Go Away’를 표절했다고 한다. 물론 유사하게 들릴 수 있다. 더 흡사하게 들리는 다른 표절 판정곡들도 있다. 하지만 유사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표절이라 확정짓는 건 다른 이야기다. 더욱이 국가 기관이 이런 일방적인 결정을 내리는 건 더 조심스러워야 했다. 당시 발표된 모든 노래를 심의한 것도 아니다. 몇몇 인기곡을 대상으로 심의하고 주홍글씨를 새겼다. 형평성에도 맞지 않고 공정하지도 않은 이 주홍글씨를 이제는 지워야 하지 않을까. 난 ‘이 밤이 지나면’이 표절이라는 판정에 동의하지 않는다. 시간의 때를 타지 않은, 지금 이 계절의 밤에 들으면 더욱 멋지고 낭만적인 노래다.

#표졀#주홍글씨#임재범#이 밤이 지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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