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해되는 아름다움, 여성의 언어[클래식의 품격/인아영의 책갈피]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7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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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아영 문학평론가
인아영 문학평론가
읽기 위해 특별한 시공간을 요구하는 소설이 있다. 고요하든 시끄럽든 그 소설에 가장 알맞은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비로소 그 소설과 만나는 통로에 이른다. 어떤 소설은 주어진 언어를 선물하지만, 어떤 소설은 내 안의 언어를 발굴하게 하기 때문일까. 브라질 여성 작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1920∼1977)의 ‘G.H.에 따른 수난’(배수아 옮김·봄날의책·2020년)이 내게는 그랬다.

“나는 살아 있는 바퀴벌레를 보았고, 그 안에서 내 가장 은밀한 삶과의 일치점을 발견했다.” 1964년에 이 소설이 출간된 이후, 리스펙토르가 브라질의 카프카나 버지니아 울프로 여겨진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브라질에서 혼자 사는 부유하고 성공한 여성 조각가가 어느 날 빈방에서 바퀴벌레를 발견한 뒤 쏟아내는 어지럽고 심원한 독백은 비할 바 없이 관능적이다.

G.H.라 불리는 이 예술가는 옷장에 있는 바퀴벌레에 극도의 혐오감, 공포를 느끼고 옷장 문으로 눌러 반으로 으깬다. 그리고 갈라진 몸의 형상, 흘러나오는 진물, 눈동자를 응시하며 광대한 심연에 압도된다. 지금까지 안다고 생각했던 자신을 철저하게 붕괴시키는 영혼의 “느리고 거대한 와해”. 그것이 이 소설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느리고 거대한 와해는 한 여자가 새로 태어나는 원초적이고 신비로운 의례이기도 하다. 수난과 환생은 한 몸이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운 환생의 계기는 왜 바퀴벌레여야 할까. 재료로 형상을 만드는 직업을 가진 그는 바퀴벌레가 다른 종에게 추하고 역겹기만 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창조되었으나 단 한 번도 아름다움에 근접하지 못한 것.” 바퀴벌레를 온전하게 바라보고 그것과 끝내 하나가 되는 강렬한 과정은 개념적인 미추(美醜)에서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관념을 벗어던진 무(無)의 세계로, 이름으로부터 해방된 중립적인 사물의 세계로. 아름다움을 허겁지겁 집어삼키곤 했던 조각가가 인간적인 아름다움에서 벗어나 극한의 리얼리티로 가는 길이 충격과 희열을 동반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것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소설의 가장 근원적인 주제인 여성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벌레를 당연히 암컷이라고 생각했다. 몸통 한가운데가 꺾인 존재는 암컷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 마리의 바퀴벌레를 보고 G.H.가 과거의 사랑을 떠올리는 것은 왜일까. 개념적인 아름다움에서 벗어나면서, 오직 단어로만 이해했던 그의 사랑 역시 비로소 개념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시(詩)가 가장 심오한 문장이라고 보았던 당(唐)의 문인 유우석이 말했듯 “뜻을 얻으면 말을 잊게 된다.” 시의 본질을 느끼는 미적 체험에 이르면 문자라는 관념을 떠나게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시가 그렇듯, 사랑 또한 그렇다.
#아름다움#여성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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