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는 것은 때로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는 경험이다. 김혜순 시인의 ‘KAL’은 그러한 경험을 몰고 오는 시다. 흩어져 살아온 형제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버지가 행불자가 되고/엄마가 시집가자/큰딸은 부산에/아들은 프랑스에/작은딸은 미국에 살았다.” 그래서 삼중으로 통역해줘야 의사소통이 가능한 세 형제의 이야기. 원래는 넷이지만 막내는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공항에서 서로를 부둥켜안은 세 형제의 품을 파고드는 것은 헤어질 때 한 살이었던 막내의 부재다. “막내는 아직 찾지 못했다./공항에서 우선 세 형제가 부둥켜안았다.” ‘우선’이라는 말이 환기하듯 그들의 포옹은 막내가 합류하기 전에는 미완성이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부모 탓도 있지만 시인은 국가에 더 큰 책임을 지운다. “애록은 무엇 때문에 일곱 살인데 세 살인데 겨우 한 살인데/맨살 달팽이처럼 외국 땅에 가서 시멘트 바닥을 기라고 했을까?/시장 바닥에 얼어붙은 배추 이파리처럼 시퍼렇게 떨라고 했을까?” 애록은 Korea를 거꾸로 읽은 것으로 한국을 의미한다. 세 아이를 외국으로 보낸 것이 본질적으로는 애록, 아니 한국 사회라는 말이다. 수많은 아이들을 해외로 보낸 애록은 “부끄러운 나라”다.
어른이 된 세 형제들이 처음으로 만났다가 헤어졌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고 큰딸만 뒤에 남았다. “비행기들이 동생들을 싣고 멀리 날아가자/혼자 남은 큰딸이 울었다.” 시인은 그들이 떠나자 “애록의 위선이 공항 화장실의 휴지로 남았다”고 말하며 우리를 몰아친다. “외국으로 떠나는 아기들이 탄 비행기를 타본 적이 있는가./그 아기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휴가를 떠나본 적이 있는가.” 해외로 입양된 아이들이 울고 있는 비행기 속으로 상상력을 동원해 들어가 보라는 거다. 불편한 시다. 우리가 그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은 그 아이들을 비행기에 태워 외국에 보내는 데 우리가 공모했을지 모른다는 자의식 때문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