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KT 등 대형 통신기업들 사이에선 ‘빨랫줄 장사’라는 자조 섞인 표현이 유행했다. 전국 모든 가구와 개인에게 이동통신과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정작 소비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통신기업들은 ‘빨랫줄(통신망)’을 제공할 뿐 그 위에 명품 옷이 걸릴지, 거적때기가 걸릴지 아무 정보를 갖지 못했다. 서비스에 가치를 더하기 어려웠다. 정작 통신망 위에서 인터넷 검색, 온라인 쇼핑, 디지털 콘텐츠 등 서비스를 거의 공짜로 제공하며 마케팅 광고주들 돈을 빨아들인 것은 네이버, 카카오, 구글, 페이스북 등 이른바 플랫폼 기업들이었다.
성패를 가른 것은 바로 소비자 관련 데이터(정보)를 누가 가져가느냐였다. 플랫폼 기업은 막대한 소비자 데이터를 확보한 덕분에 소비자가 무엇을 사고 먹고 기록하는지, 어디로 이동하는지 일거수일투족을 세세히 알고 쉽게 예측할 수 있게 됐다.
플랫폼 기업의 정보 독식은 플랫폼을 통해 물건과 서비스를 파는 입점 업체를 대상으로도 작동했다. 온라인 쇼핑몰에 입점한 업체들이 고작 주문 내역만 알 수 있다면 플랫폼은 이들이 앞으로 무엇을 살지까지 알고 있다.
데이터에서 나오는 디지털 경제 지배력을 거대 플랫폼 기업들이 손에 쥔 셈이다. 이를 기반으로 금융, 쇼핑, 게임, 택시, 콘텐츠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진출하면서 영향력은 더욱 커지고 있다. 소비자들은 모든 서비스가 하나의 접점에서 저렴하게 이뤄지는 혁신의 단맛을 맛보지만 적지 않은 전문가들은 거대 플랫폼으로의 집중은 필연적으로 장기적인 요금 인상 등 시장 독점 폐해를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한다.
문제는 혁신과 독점이 플랫폼의 두 얼굴처럼 서로 맞붙어 있다는 점이다. 플랫폼은 독점을 위해 혁신과 투자를 거듭하고, 그 덕분에 (단기간 동안은) 소비자가 혜택을 볼 수 있는 구조다.
최근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 수장으로 선임되며 ‘아마존 저격수’로 떠오른 리나 칸 위원장은 자신을 스타로 만든 논문에서 이 같은 문제를 ‘아마존의 반독점법 패러독스’라고 표현하고 아마존 같은 빅테크 독점 폐해는 기존 방법으로는 막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수익이 아니라 성장 자체를 목표로 낮은 가격을 유지하는 아마존은 소비자에게 이익을 주기 때문에 소비자 후생 감소를 막으려 설계된 기존 독점금지법으로는 규제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칸은 아마존 같은 대형 플랫폼 인프라를 통신망이나 전력망처럼 사회 필수시설로 지정하고 다른 경쟁 플랫폼 기업들이 차별 없이 접근해 이용하도록 해야 한다는 도발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칸 임명으로 미 정부가 아마존, 페이스북 같은 빅테크에 분할 명령을 내릴 것이란 전망까지 나오는 등 플랫폼 문제 해법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유럽연합(EU)과 일본 등에서도 플랫폼 규제법을 제정하는 등 문제 해결에 나서는 분위기다.
국내에서도 공정거래위원회 등에서 여러 제도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나오고 있지만 아직은 거대 플랫폼과 영세 입점 업체 사이 이른바 갑을 관계의 불공정 계약을 막는 데에서 논의가 그치는 형편이다. 업계에선 중개거래계약서 의무 작성, 계약 기간 일률 제한 등 규제가 플랫폼 혁신 동력을 떨어뜨릴 것이라는 반발도 나온다. 플랫폼 문제 해법이 어려운 것은 혁신과 독점이 한 몸처럼 붙어 있다는 데 있다. 독점 폐해를 막되 플랫폼 기업끼리 혁신 경쟁을 보호하는 정교한 접근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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