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종 막론하고 책임자라면 公人의 마음 필요
하고 싶은 일 못지않게 해야 할 일이 우선
약속한 일 잘해내야 조직, 공동체 유지 가능
일하는 사람에겐 성과 거둘 능력이 공정 의미
몇 년 전, 행정고시에 합격해 사회에 막 첫발을 내딛는 분들께 강연을 한 적이 있다. 그날 강연의 요지는 이랬다. ‘일 잘하는 공무원이 되라!’
그들도 청년인지라 하고 싶은 것에 들떠 있을 수 있는데 나는 “하기로 되어 있는 일, 그 자리가 요구하는 일을 하라. 유능해지라”라고 말했다. 사실 이런 말은 인기가 없다. 해야 할 일을 하라니. 유능해지라니. 우리 사회는 온통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한데 말이다. 물론 나는 저마다의 건강한 욕망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런 욕망이야말로 생의 에너지라고 믿는 사람이다. 하지만 공적인 영역은 다르다. 많은 이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정책을 입안하고 의사 결정을 하게 될 사람들이라면 하고 싶은 일 못지않게 해야 할 일을 우선시하고 능력이 있어야 한다.
한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공인(公人)이란 꼭 국가나 사회의 일을 하는 사람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지 싶다. 직장인이든 자영업자든 일하는 사람이라면 어느 업종, 어느 직급을 막론하고 누구나 책임을 맡는다. 사전적 의미에서의 ‘공인’의 뜻과는 다르지만, 책임을 맡은 사람은 모두가 얼마간 공인이며 공인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도 예전 광고회사에서 일할 때의 한 장면이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중요한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앞둔 때였다. 몹시 추운 겨울이었는데 게다가 프레젠테이션 시간이 오전 8시였다. 우리는 당일 오전 1시까지 리뷰를 거듭했고 출발 전에 한 번 더 하기로 했다. 나도 집에 가 옷만 갈아입고는 다시 출근했다. 오전 5시쯤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우리 팀원 몇이 차에 기자재를 싣고 있었다. 그 새벽에 벌써 일을 시작했던 거다. 내가 좀 더 현명한 리더였다면 그렇게 무리하게 일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그 순간 콧등이 시큰해졌다. 빛이 나는 일이 아님에도 애쓰는 걸 보는 마음이 그랬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게 재미있어서 했을까? 좋아서 했을까? 춥고 피곤하지만 맡은 책임을 다하기 위해 추운 겨울 새벽에 나왔을 것이다.
일을 함께하는 사람들은 맡은 업무가 다르고 책임의 크기가 달라도 서로에게 의지하며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가 된다. 때문에, 그 일에 참여한 사람은 누구 할 것 없이 맡은 일을 성심껏 잘해내야 그 일이 잘 돌아가고 성과가 난다.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 함께 일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이 돌아간다. ‘함께’를 위해 각자가 최선의 열과 성을 다하는 것. 나는 이런 관계야말로 공적(公的) 관계라 말하고 싶다. 중요한 것은 ‘공적’이란 말이 들어가는 순간, 때로는 개인의 호오(好惡)를 뒷전으로 물리더라도 하기로 한 일, 약속한 일은 어쨌든 해내야 한다는 거다. 그것도 잘해야 한다. 그래야 그 업무가, 그 조직이, 그 공동체가 유지된다. 자기 자신뿐 아니라 모두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잘해야 하는 거다.
나는 오래전부터 ‘능력’이란 화두에 천착했다. 광고회사에서 일하던 시절엔 이런 카피를 쓴 적도 있다.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2002년 월드컵 때 진행된 모 카드회사의 광고 캠페인이다. 거스 히딩크 감독을 모델로 해서 “히딩크,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웠다. 이 광고가 히딩크 감독과 대표팀에 주문이라도 건 것일까? 아시다시피 우리 팀은 신들린 듯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고 광고도 덩달아 대박을 터뜨렸다. 이 덕분에 이 카피는 내 광고 인생을 대표하는 카피가 되었다. 만약 우리 팀의 성적이 신통치 않았다면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운이 좋았다. 물론 나는 역사에서 개인이 발휘하는 힘을 믿는 사람이지만 그 누구도 능력만으로 성과를 내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성과는 능력 말고도 여러 변수의 총합이다. 능력 있는 분들일수록 겸손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책임을 맡은 사람이 유능해야 한다는 건 별개로 중요한 문제다. 성과가 능력만의 결과가 아닌 것처럼 능력 없이는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것 또한 옳은 말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 ‘공정’에 이어 ‘능력’이 뜨거운 화두다. 어느 개인이 능력을 갖기까지 부모나 공동체의 도움이 크므로 능력을 우선시하는 건 공정하지 못하다는 얘기도 들린다. 동의하는 바도 있지만 ‘능력’의 중요한 측면은, 책임을 맡은 사람은 유능해야 하고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거다! 일하는 사람에겐 ‘능력’이야말로 공정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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