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수백 년간 백제의 왕도였지만 급격한 도시화 과정에서 백제 유적 다수가 사라졌다. 지금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 일부만 남아 있다. 그간 여러 차례 발굴 조사를 실시했지만 최고급 물품의 출토 사례는 극히 적다. 다만 백제왕이 지방 유력자들에게 준 물품들이 여러 유적에서 간간이 출토된 바 있어 백제 건국 초기인 한성기 백제 문화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2003년에 발굴된 공주 수촌리고분군에서는 백제왕릉 출토품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품격을 지닌 유물이 무더기로 출토됐다. 이 유물들은 한성기 백제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됐을 뿐만 아니라 그간 학계에서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 웅진(현 공주) 천도의 배경을 밝히는 데 결정적 단서가 됐다.
○ 농공단지 만들려다 발견한 유적
중요한 유적은 때론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우연히 발견되곤 한다. 무령왕릉이 그러했듯 공주 수촌리고분군도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고분군이 위치한 충남 공주 의당면은 공주 시가지에서 북쪽으로 치우쳐 있다. 정안천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논이 있고 야트막한 능선마다 밤나무가 심어진 한적한 농촌 풍경이 펼쳐져 있다.
2000년대 초반 공주시는 의당면 수촌리 일대에 농공단지를 만들기로 하고 공사 대상 부지에 유적이 분포하는지 여부를 확인하고자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에 조사를 맡겼다. 공주시나 발굴기관 모두 공사 대상 부지에 중요 유적이 분포되어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지표상에서 토기 조각이 약간 수습됐지만 봉분 흔적 등 중요 유적 분포 징후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3년 발굴에 착수한 다음 조사원들이 일부 구역의 표토를 제거하자 백제 목곽묘와 석실묘가 군집돼 있음이 드러났다. 특히 ‘Ⅱ구역’이라 명명한 곳에서는 무덤 5기가 둥근 원을 그리며 모여 있었다.
○ 백제왕이 준 신임의 징표
무덤 5기에 차례로 번호를 매긴 다음 1호분부터 파고 들어갔다. 1호분은 장방형 구덩이 안에 목곽을 시설한 무덤이며 5세기 초 축조된 것이다. 무덤 내부에 매몰된 흙을 제거하자 가장자리 쪽에서 마구(馬具), 무기 등 철기와 함께 중국 동진에서 들여온 청자가 출토됐다. 이어 무덤 주인공의 유해 부위에서 화려한 금동관이 드러났다.
금동관 외형은 고깔 모양이고 불꽃무늬와 용무늬가 섬세하게 조각된 명품이었다. 서울에서 출토됐다면 백제 왕관이라고 단정해도 좋을 정도로 화려했다. 금동관 주변을 노출하니 금 귀걸이 한 쌍이 있었고 조금 아래쪽에서 짐승 머리가 새겨진 허리띠 장식, 용무늬가 상감기법으로 표현된 장식대도가 차례로 발견됐다. 무덤 주인공 발치에는 금동신발 한 켤레가 놓여 있었는데 발굴 후 엑스선 촬영 결과 발 뼈가 들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 발굴된 4호분은 1호분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만들어진 석실묘로 1호분에 버금가는 화려한 유물이 다수 출토됐다. 이 무덤에서 출토된 금동관에도 불꽃무늬와 용무늬가 조각되어 있었다.
수촌리고분군 발굴이 기폭제가 됐는지, 그 이후 백제 지방이었던 경기 화성, 충남 서산, 전북 고창, 전남 나주, 고흥에서 5세기 백제의 화려한 황금 유물이 연이어 발굴됐다. 이 유물들은 고구려나 신라의 것과 다른 백제만의 스타일을 지니고 있어 백제왕의 사여품(賜與品)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아마도 당시 백제왕이 지방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현지 세력들을 활용했고 그들에게 신임의 징표로 왕과 그 일족들이 전유했던 귀중품 일부를 나누어준 것 같다.
○ 1500년 만에 짝 찾은 대롱옥
4호분 발굴이 끝나갈 무렵 짙은 갈색조의 대롱옥(구멍 뚫은 짧은 대롱 모양 구슬) 1점이 수습됐다. 잘 만들어졌지만 한쪽 끝이 파손된 모습이었다. 조사원들은 혹시나 남은 파편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주변을 샅샅이 조사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의문이 남았으나 4호분 발굴은 그대로 종료됐다.
이어 5호분 내부에 대한 세밀한 발굴이 시작됐다. 5호분은 4호분에 버금가는 규모의 석실분이었지만 화려한 황금 장식이 출토되지 않았다. 출토된 토기로 보아 4호분보다 조금 늦은 5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무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무덤 바닥에도 4호분과 마찬가지로 짙은 갈색 대롱옥 한 점이 놓여 있었다. 조심스레 수습해 세척하니 이 역시 한쪽 끝이 파손된 모습이었다.
조사원들은 ‘혹시나…’ 하는 기대에 이미 수습한 4호분 대롱옥과 파손 부위를 맞추어 봤다. 예상대로 한 치 어긋남 없이 완벽하게 이빨이 맞았다. 원래 하나였던 것이 절반으로 잘려 두 무덤에 각기 묻힌 것이다. 남성 무덤인 4호분이 먼저 축조되고 여성 무덤인 5호분이 나중에 축조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남편이 먼저 세상을 뜨자 부인이 자신의 애장품을 반으로 잘라 남편 무덤에 묻어준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저세상에서도 서로를 알아보기 위한 징표, 즉 재회의 부절(符節)은 아니었을까.
수촌리고분군은 발굴 후 중요성을 인정받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됐고 공주시는 농공단지 신축 계획을 포기했다. 이 고분군에 대한 발굴이 최근까지 이어져 무덤 수십 기가 추가로 조사됐다. 이 고분군에서 발굴된 금동관을 비롯해 화려한 장신구들은 한성기 백제의 공예 기술이나 복식 제도를 밝히는 데 핵심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이에 더해 백제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을 중심으로 475년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은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것은 수촌리고분군에 묻힌 인물들처럼 가장 믿을 수 있는 세력이 그곳에 존재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와 지지를 받고 있다. 물론 아직 모든 것이 온전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수촌리고분군이 이와 같은 새로운 연구의 출발점이 됐으며 백제사 속 여백을 메우려는 학자들에게는 어두운 하늘 ‘한 줄기 빛’처럼 새로운 희망을 던져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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