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부가 지난해 9월 해양수산부 공무원 피격 사건 이후 전면 중단됐던 민간 차원의 대북 물자 반출 승인을 어제 재개했다. 내달 중순 예정된 한미 연합훈련에 대해선 “연기가 바람직하다”는 입장도 밝혔다. 남북 통신선이 복원된 지 사흘 만에 대북 지원의 길을 트고, 훈련 연기 의사를 밝힌 것이다. 통일부는 그제 북한에 영상회담 시스템 마련을 위한 협의를 제안한 사실도 뒤늦게 공개했다.
정부가 이런 행보에 나선 것은 한미 연합훈련 실시 결정에 앞서 북한을 대화로 한 발짝 더 끌어들이려는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북한은 언제나 그랬듯 시간을 끌며 몸값을 키울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정부는 영상회담 의사를 내비친 지 하루 만에, 북한의 답이 오기도 전에 대북 지원의 물꼬를 텄다. 대화에 대한 조급증이 그만큼 크다고 볼 수밖에 없다. 여권에서 벌써부터 내년 2월 베이징 겨울올림픽을 계기로 한 남북 정상회담 가능성이 흘러나오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지난해 해수부 공무원이 북한군의 총격에 피살됐을 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과 남녘 동포들에게 실망감을 줘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정부가 요구한 공동 조사에는 응하지 않아 아직도 진상 규명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유족의 아픔도 여전하다. 당시 정부가 취한 유일한 대응 조치가 대북 물자의 반출 승인 중단이었다. 그런데 통신선이 회복되자 이런 조치가 기다렸다는 듯이 백지화된 것이다.
통일부 고위 당국자는 어제 “미국 입장에서도 이 기회를 살려내는 것이 매우 유익한 성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며 연합훈련 연기를 공개 주장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북한 대외매체는 통신선 복원에 대해 “북남 교착을 초래한 원인에 대한 반성과 재발 방지의 다짐을 전제로 했다고 볼 수 있다”고 전했다. 이를 감안하면 남북이 이미 연합훈련 연기 등을 논의한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북한이 여태껏 한 조치는 스스로 끊었던 통신선을 복원한 것일 뿐이다. 약속했던 비핵화 조치를 이행하는 것은 고사하고 실질적인 대화를 할 의지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 미국과의 비핵화 대화도 외면하고 있다. 비핵화 대화의 진전이 없는 남북 교류가 공허하다는 것은 3년 전 평창이 남긴 교훈이다. 정부가 임기 말 조급증에 매달려 혼자 앞서 나가다가는 미국으로부터 의심받고, 북한에 외면받는 상황이 재현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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