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J의 말을 듣고 내 귀를 의심했다. 변호사 M이 검찰청의 현실을 설명할 땐 무릎이 꺾였다. 대한민국 검사가 수사 자료를 안 읽고 결론짓는 경우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2000명 검사 가운데 상당수는 기록과 사건 관계인에 묻혀 산다. 어처구니없는 일은 고등검찰청에 올라온 ‘항고(抗告) 사건’ 때 두드러진다고 했다.
항고란 이런 것이다. △2000만 원을 빌려간 뒤 안 갚거나 △회삿돈 3000만 원을 빼돌렸다는 다툼을 떠올려 보자. 수사를 해 보면 혐의 없음, 증거 부족, 범죄 안 됨 등의 결론은 다반사다. 동의 못 한다면 고소인이 고등검찰청에 다시 판단을 요청할 기회가 있다. 그게 항고 제도다.
2019년 한 해 동안 “무혐의라니 억울하다”며 제출한 항고장이 3만 건이 넘는다. 이 가운데 “따져 보니 재수사가 맞겠다”고 내려보내는 것이 10% 정도다. 고검 검사가 수사 기록을 보는 둥 마는 둥 한다는 말은 나머지 90%에서 나온다. 고등검찰청은 부장검사급 이상만 배치되는 곳이다. 베테랑 검사의 집합소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형사부 검사였던 J의 문제 제기는 ‘다시 살펴봤지만, 수사할 필요 없다는 당초 결론이 옳다’는 불기소 결정문에서 극적으로 확인된다. 고검 검사가 중앙컴퓨터에서 양식을 내려받는데, 단 한 문장만 인쇄돼 있다. 이 항고사건의 피의사실 및 불기소 이유의 요지는 불기소처분 검사의 불기소 결정서 기재와 같아 이를 원용하고, 항고청 담당검사가 새로이 기록을 살펴보아도 원 불기소처분이 부당하다고 인정할 자료를 발견할 수 없으므로 주문과 같이 결정한다.
바로 이 문장에 한 글자도 추가하지 않은 채 도장 찍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했다. 인쇄된 표현처럼, 검사가 민원인이 애써 준비한 서류를 ‘새로이’ 확인해 봤는지 알 방법도 없다. 사기당했다면서 고소하고, 기각되자 다시 항고한 민원인들은 대체로 자기 돈 들여 변호사도 고용한다. 이들이 맹탕 문서를 받아 들고 승복할 것으로 검찰은 믿는 걸까. 억하심정에 무리한 형사 고소도 많다. 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검찰에 한을 품는 이른바 사법 피해자가 매년 1만 명 넘게 생겨난다.
검사는 왜 기각 이유를 안 쓸까. J와 M의 생각처럼 수사 기록을 본 게 없으니 설명거리가 없는 걸까. 사실이라면, 검찰 지휘부는 바로잡아야 한다. 두세 문장이라도 구체적인 사유 작성을 의무화해야 한다.
‘한 문장 기각’은 지방검찰청 수사에서도 원칙이란 점에 한 번 더 놀랐다. ‘고소 사건 기각 땐 사유를 안 써도 된다’고 일찍이 YS 시절에 검찰총장이 결정했다고 했다. “검사 업무를 줄여주자”는 이유였다고 검사 경력 30년인 M은 기억했다.
국가의 일은 나라 전체를 살피는 것과 함께 개개인의 행복과 만족을 살피는 쪽으로 달라지고 있다. 검찰도 예외는 아니다. 기로에 선 검찰이 못 느끼고 있을 뿐이다.
따지고 보면 검찰도 ‘한 문장 결정’의 피해자다. 판사는 “도주와 증거 인멸 우려가 없다”는 한 문장으로 구속영장을 기각한다. 이번엔 수사검사가 분개하지만, 그때뿐이다.
검찰은 스스로 달라질까, 아니면 외부의 힘이 검찰을 바꿀까. 대검찰청 기획조정부와 형사부 그리고 법무부 검찰국이 다뤄야 하는 사안이다. 국회 법사위도 자기 몫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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