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개혁’ 모자를 쓴 ‘언론통제’[기고/이충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9일 03시 00분


이충윤 법무법인 해율 변호사·전 대한변호사협회 대변인
이충윤 법무법인 해율 변호사·전 대한변호사협회 대변인
영국 철학자 제러미 벤담은 교도소의 한 형태로 파놉티콘을 제안했다. pan(모두)과 opticon(보다)이 합쳐진 이 단어는 ‘한눈에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벤담에 의하면 파놉티콘에 갇힌 죄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항상 감시하는 간수를 의식해 스스로를 통제하게 된다.

18세기 영국에서 실제 도입이 좌절된 파놉티콘이 21세기 한국에서 구현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지난달 27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문화예술법안심사소위에서 언론중재법 개정안 의결을 강행했다. 이번 개정안은 신문·방송사, 인터넷신문사가 고의·중과실에 따라 허위·조작보도를 했을 때 징벌적 손해배상 의무를 부과하고, 인터넷 기사의 열람 차단 청구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여당은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8월 중 개정안 통과 입장을 밝혔다.

개정안은 허위·조작보도 폐해를 막겠다며 법원이 인정한 손해액의 5배까지 배상하도록 한 것도 모자라 언론사 매출액의 1만분의 1이라는 하한액까지 설정했다. 근래 법원은 이미 기사로 인한 정신적 손해를 엄격하게 보고 액수를 강화하고 있다. 그런데 ‘허위’ ‘조작’과 같이 명확하지 않고 판단 여지가 큰 개념을 도입하여 거액의 배상을 하게 한다는 것은 헌법상 보장된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고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방대한 고의·중과실 추정 규정도 문제다. 민사법의 대원칙은 주장하는 자에게 입증 책임을 부과하므로 보도의 폐해를 주장하는 사람이 언론사의 고의·중과실을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개정안은 단지 정정보도 청구 표시를 하지 않은 것처럼 개연성이 적은 경우에도 언론사의 명백한 고의·중과실을 추정하여 민사원칙을 무시하고 언론사에 과실 없이 주의를 다했다는 입증 책임을 사실상 전가한다. 이러한 입법례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우리나라에는 사실적시명예훼손 등 형사처벌도 이미 존재한다는 점에서 더욱 과도한 규제다. 정정보도의 시간·분량 및 크기를 강제하는 조항 역시 언론의 자율성과 편집권을 정면으로 침해한다.

언론·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상 기본권을 법률로써 제한하는 경우 입법자는 기본권 침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군부 독재정권이 언론 자유를 통제했을 때 대한민국과 자유민주주의는 빛을 잃고 방황했다. 그런데 여당은 어떠한가. 야당, 언론, 법조계 등의 의견을 심도 있게 수렴하지 않고 다수의 의결권만 내세워 조속히 통과시키려고만 하고 있다.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이러한 태도는 정치인 및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의혹 보도의 원천 봉쇄 등 부적절한 취지를 환기할 수밖에 없다.

언론은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고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의 기능을 통해 사회가 더욱 건전한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기여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경미한 오류가 있었다고 하여 거액의 손해배상과 제반 규제가 인정된다면 언론의 순기능은 위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결국 국민의 표현의 자유와 알 권리 침해로 귀결될 뿐이다.

#언론중재법 개정안#언론통제#언론 순기능 위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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