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3일 시작된 도쿄 올림픽은 17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8월 8일 막을 내렸다. 무엇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1년 늦게 무관중으로 치러진 이례적인 올림픽’으로 세계에 기억될 것이다. 일본인들에게도 국론을 양분시킨 ‘쓰라린 기억’을 동반하는 올림픽이 됐다.
사실 사전에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중지나 재연기 요구가 개최론보다 많았다. 게다가 올림픽 기간 5차 감염 확대가 일어나 일본 정부는 도쿄와 오키나와를 대상으로 한 ‘긴급사태 선언’ 지역에 수도권 3개 현과 오사카를 포함시키고, 그 외 지역에서도 경계 체제를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올림픽 유치 당시 내걸었던 대의와 이념은 크게 왜곡됐다. 아이디어를 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당시 도쿄도지사는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의 부흥을 상정해 그걸 축하하면서 전진하기 위한 이벤트’로 만들겠다고 강조했고,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도 지난해 10월 임시국회에서 ‘인류가 바이러스를 이겨낸 증거로 도쿄 올림픽·패럴림픽을 개최한다’고 강조했다.
개·폐회식 연출이 좋지 않았던 것은 개최 직전 불상사가 잇따랐기 때문도, 일본 문화가 섬세하고 서정적이어서 웅장하고 서사적인 주제를 약하게 다뤘기 때문도 아니다. 팬데믹이 도쿄 올림픽으로부터 이념과 대의를 빼앗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본은 금메달 27개를 포함해 모두 58개의 메달을 따냈다. 그래서인지 아사히신문 여론조사에서 올림픽을 ‘개최해 좋았다’는 응답이 56%에 달했다. 그러나 정부의 코로나19 대책을 ‘평가하지 않는다’는 목소리도 66%를 차지했다. 올림픽이 바이러스 감염을 확대시켰는지에 대한 논란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많은 해외 선수들은 감사를 전하고 있다. 도쿄행 비행기를 타기까지 올림픽 개최를 믿을 수 없었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시간이 흐를수록 ‘일본인은 팬데믹 아래에서도 근대 올림픽 운동의 횃불을 끄지 않았다’는 자존심이 강해질 것이다. 그것은 내셔널리즘이다.
TV를 보면서 상쾌했던 것은 스케이트보드, 서핑, 스포츠클라이밍 등 젊은 문화에서 발전한 새로운 경기다. 참가자는 개인적으로 기술과 스피드를 겨룰 뿐 상호간에 매우 우호적이었다. 메달에 관심이 있어도 국가나 국기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것은 오히려 올림픽 경기의 이상에 가깝게 여겨졌다.
유감스러웠던 것은 한국과 일본이 내셔널리즘 때문인지 몇 번이나 충돌한 것이다. 나이 많은 ‘친한파’로서 그걸 보는 것이 무엇보다 고통스러웠다. 도쿄 올림픽 조직위원회의 공식 홈페이지가 사용한 지도에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식 이름)가 포함돼 있다는 비난이나 한국 선수단이 선수촌 숙소에 내건 현수막 등 경기 이전의 문제가 많았다.
일반적인 일본인들을 가장 분개하게 만든 것은 한국의 급식지원센터가 후쿠시마와 그 주변 8개 현의 식재료를 배제한 것뿐 아니라 일본산 식재료에 대해 방사능 측정을 실시해 보란 듯이 발표했다는 점이다. 그 행동은 대지진 피해자로 필사적으로 부흥 노력을 계속하는 후쿠시마 현민에게 상처 입히는 것으로 이해됐다. 급식센터 설치의 옳고 그름과는 상관없다.
한일 정부 간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도쿄 올림픽 개회식에 참석할지 안 할지를 둘러싸고 외교적 힘겨루기가 벌어졌다. 평창 겨울올림픽의 성공 체험도 있었기에 한국 측은 의례적인 일한(한일)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것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성과, 즉 일본 측의 대한(對韓) 수출관리 엄격화 조치 철회를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양측 의견이 ‘상당히 접근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솔직히 수출 관리 엄격화는 한국 내 징용 소송에 대한 대항 조치다. 일본 측에 있어 그것은 일한 기본조약과 청구권 협정의 해석, 즉 한일 관계 전반의 법적 기반과 관련된 분쟁의 일부다. 일괄 타결 전망 없이 수출 관리 엄격화만 철회할 수는 없다. 여기에 더해 이미 올림픽과 코로나19 대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고 있던 일본 정부는 일한 정상회담 성과라는 세 번째 토끼를 쫓을 의지도 여유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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