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촌장’의 새로운 앨범 준비를 마친 하덕규는 대구로 내려갔다. 대구 나이트클럽 무대에 서며 연주하던 기타리스트 함춘호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함춘호의 실력은 이미 서울에까지 소문이 나 있었고, 그런 그를 시인과 촌장의 새 멤버로 영입하기 위해 대구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1984년이었다.
이미 앨범에 들어갈 노래는 완성이 돼 있었다. 함춘호를 만난 하덕규는 그동안 만든 노래를 들려주었다. 이 노래들을 빛나게 해줄, 창작자가 머릿속에서만 구상하고 있던 사운드를 표현할 연주자가 필요했다. 그게 함춘호였다. 하덕규의 음악에 매료된 함춘호는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둘은 1986년 한 장의 앨범을 만들었다.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빠지지 않는 명반, 시인과 촌장의 두 번째 앨범 ‘푸른 돛’이다.
‘푸른 돛’은 흔히 포크 앨범으로 분류되지만 기묘한 아트 록 앨범 같기도 하다. 서정적인 포크 선율뿐 아니라 매우 로킹(rocking)한 연주가 담겨 있고, 때로는 동요 같은 선율이, 때로는 트로트풍 연주가 들리기도 한다. 하덕규의 구상은 꼭 맞아떨어졌다. 탁월한 싱어송라이터 하덕규의 음악을 함춘호의 기타는 더 넓은 세계로 확장시켜 주었다. 함춘호는 이 한 장의 앨범만을 함께하고 시인과 촌장을 떠났지만, 그를 계속해서 시인과 촌장의 일원으로 기억하는 건 둘이 보여준 환상적인 호흡 때문이었다.
시인과 촌장을 떠난 뒤 함춘호는 스튜디오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생계를 위해 시작한 세션 연주 일이었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찾게 되면서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기타리스트가 되었다. 조금 과장을 섞어 말하자면 1990년대엔 그의 이름이 적히지 않은 음반을 찾는 게 더 어려울 만큼 수없이 많은 앨범에 참여했다. 패티김, 나훈아, 김광석, 신승훈, SG워너비, 아이유, 트와이스 등 장르도 가리지 않았다. 시인과 촌장에서 들려준 그 다채로운 세계가 다양한 장르의 음반에서 빛을 발했다.
그는 일부러 자신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연주를 통해 자연스레 이름을 알렸다. 장필순의 아름다운 명곡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에서 함춘호의 기타 연주가 없었다면 감흥의 깊이는 지금보다 덜했을 것이다. 그가 들려준 모던 록 스타일의 기타 연주는 여전히 민중가수 이미지를 갖고 있던 안치환의 변신을 함께 견인해 주었다. 좋은 연주가 연출해내는 이런 긍정적인 사례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시인과 촌장의 ‘푸른 돛’은 35년 전 발표됐다. 이는 함춘호가 공식 데뷔한 지 35년이 되었다는 말이다. 가수의 ○○주년 기념 콘서트 같은 건 흔하게 볼 수 있지만 연주자를 기념하는 건 너무나 인색하다. 그동안 한국 대중음악사는 가수 중심으로 쓰여 왔다. 그래서 쓴다. 그의 35주년을 기념하며 35년 전 노래 ‘고양이’를 듣는다. 그는 기타 연주로 고양이 한 마리를 만들어내고 심지어 뛰어놀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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