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공부하는 이유[이기진 교수의 만만한 과학]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13일 03시 00분


이기진 교수 그림
이기진 교수 그림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매미 소리가 텅 빈 대학의 8월을 장악하고 있다. 아침 일찍 학교에 오면 슬리퍼에 반바지로 갈아입고 일을 시작한다.

나에게 여름방학은 조만간 있을 가을 경기를 위해 몸을 만드는 시간이다. 새학기 시작의 벨이 울리면 단거리 육상 선수와 같이 앞을 보고 달려야 한다. 이 경기를 위해 최대한 기초체력을 마련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 한다. 물리학자인 나에게 기초체력은 공부다. 달리 뭐가 있겠는가! 중요한 공부 중 하나는 다른 물리학자들의 논문을 읽는 것이다.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앞으로 휙 지나가는 젊고 뛰어난 친구들과 경쟁해야 하는 이 세계에서 중요한 일은 지금의 내 속도와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다. 앞에서 달리는 선두 그룹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

물리학자는 논문이라는 형식을 통해 경쟁한다. 스포츠 경기 규칙처럼 논문의 짜임새에도 규칙이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지금까지 선행 연구들로는 다음과 같은 연구들이 있으며, 나는 이번에 이러한 일을 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이론이나 실험보다 이러저러한 부분에서 새롭고 창의적인 일이다. 내가 밝힌 결과들은 이런 것이고, 결론은 이렇다. 그러고는 뒷부분에 참고한 사람들의 논문을 언급하며 논문을 마무리 짓는다.

세상은 항상 나보다 앞서 있다. 나는 따라가는 사람이다. 뭐 꼭 앞서가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세상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된다. 앞서가는 사람도 마찬가지겠지만, 따라가는 사람 역시 항상 숨이 차고 여유가 없다. 따라가기 위해서, 쫓아가기 위해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많은지. 그들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싶고,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일을 하고 싶다. 이런 일들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남들보다 더 노력하고 배우는 자세를 갖지 않으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다.

얼마 전 복도에서 블랙홀 이론물리학자인 옆 연구실 김 교수를 만났다. 복도에서 만난 김에 최근 ‘네이처’지에 발표된 블랙홀에 대한 논문에 대해 한참 이야기했다. 내가 항상 질문하는 입장이지만.

내용은 이렇다. 미국 스탠퍼드대 천체실험물리학자 댄 윌킨스 박사팀이 블랙홀에서 시간차를 가진 두 종류의 X선을 관측했다. 블랙홀은 가만히 있지 않고 회전한다. 블랙홀 주변은 거대중력에 의해 회전하고 공간은 휘어진다. 중력에 의해 물질들이 빨려 들어가고 에너지가 높아진다. 이 높은 에너지로 인해 원자는 조각조각이 나 핵과 전자로 부서진다. 이 상태에서 블랙홀 주변은 플라스마 상태로 북극의 오로라 같은 코로나가 발생한다. 이 코로나 상태에서 조각이 나 가속된 전자에서 X선이 발생한다. 이 X선은 코로나에서 나오는 X선이다. 시간차를 가지고 뒤에 나오는 X선은 블랙홀의 바깥 경계인 ‘사건의 지평선’ 근처에서 나오는 X선이다. 이 X선 관측으로 인해 연구진은 최초로 블랙홀의 경계에 대한 물리적 정보를 알게 되었다. 멋진 일을 해냈다. 올림픽 경기 금메달처럼.

세상은 이렇게 새로운 일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앞으로 나아간다. 나 역시 이런 멋진 사람들과 함께 나아가고 싶다는 생각이다. 논문을 읽는 무더운 여름, 매미 소리와 선풍기 소리가 정겹게 느껴진다.

#물리학자#여름방학#기초체력#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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