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막 내린 2020 도쿄 올림픽에는 역대 가장 많은 비중(48.8%)의 여성 선수들이 참가했다. 코로나19 위협 속에서도 몸을 던져 승부를 벌이고, 결과에 포효하는 그들의 강인한 모습에 관중은 열광했다. 특히 노출이 많던 수영복 대신 젠더리스(genderless·성별 구분을 없앤) 전신 타이츠를 처음으로 입은 독일 여자 기계체조 대표팀이나,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부 누리꾼의 ‘페미니스트’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고 국내 여름올림픽 첫 3관왕을 거둔 안산 양궁 국가대표 등 모두의 노력으로 첫 ‘양성평등 올림픽’을 실현해 냈다. 올여름 이들이 몸소 보여준 ‘최선’의 정의가 ‘MZ세대’의 성역할 인식에도 선한 영향력을 미칠 것이라 믿는다.
그런 기대감 때문인지 여전히 ‘내조의 여왕’ 프레임 속에 갇혀 있는 국내 대선주자 부인들의 구시대적 행보가 더욱 아쉽다. 여야를 막론하고 이들의 역할은 묵묵히 남편을 뒷바라지하는 순종적 현모양처로 국한돼 있다. 눈물과 희생으로 점철된 ‘감성팔이’ 키워드로도 자주 묘사된다.
최재형 전 감사원장의 부인 이소연 씨는 최근 남편 유튜브 채널과의 첫 인터뷰에서 눈물을 보였다. 이 씨는 “지금까진 당신이 나를 아껴주고 항상 도와줬는데 이제는 내가 도와드려야 할 차례인 것 같다”고 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도 같은 날 페이스북에 부인 김혜경 씨와 손잡고 찍은 사진을 올리고 “꿈 많던 음대생이 온갖 모진 일을 마주해야 하는 정치인의 아내로 살기까지 무수히 많은 감내의 시간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부인 김숙희 씨는 두 달 넘게 호남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봉사의 가치를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꼭 고무장갑 끼고 설거지하는 모습만이 아니라, 20년 이상 중고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했던 김 씨의 교육 전문가로서의 모습도 보고 싶다.
물론 현실적인 고민도 있을 것이다. 한 캠프 관계자는 “후보 부인이 지나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경우 아직 한국 정서상 너무 ‘나댄다’는 세간의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고 했다. 하긴, 김정숙 여사는 2019년 동남아 순방 중 남편인 문재인 대통령보다 몇 발짝 앞서 걸었다고 논란이 됐고, 최근 김건희 씨는 야권 1위 대선주자의 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조롱과 비하로 점철된 ‘벽화 폭력’까지 당했다.
하지만 이처럼 올림픽 경기장 바깥 현실은 아직 훨씬 열악하기에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해외에서도 전통적인 영부인상을 깨기 위한 시도들이 몇 년째 이어지고 있다. 미셸 오바마는 2012년과 2016년 전당대회 때마다 에너지 넘치는 연설로 유권자들을 압도했다. 질 바이든은 미국 역사상 첫 ‘직장인 영부인’이다. 호칭도 ‘바이든 여사(Mrs)’ 대신 ‘바이든 박사(Dr)’로 쓴다. 프랑스 대통령 부인 브리지트 마크롱도 자신의 교사 경력을 살려 교육 개혁 및 성평등 공약을 제안하는 등 대선 과정 내내 정치적 조언자로 기여했다.
언제나 첫걸음이 어려울 뿐이다. 내년 한국 대선에서도 남편 그림자 뒤에 가려진 내조자가 아닌, 보다 주체적인 개인으로서의 새로운 ‘영부인 롤모델’이 탄생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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