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사고가 있었다. 전화를 받고 응급실로 향하던 그 길이 아직도 아득하다. 병상에 누운 남편 얼굴을 확인하자 그나마 안도감이 밀려왔다. 두려워했던 만큼의 무서운 사고는 아니었지만, 한시바삐 수술이 필요한 여전히 큰일이었다. 이송이 필요해 구급차를 탔다. 고통스러워하는 남편 손을 감싸 쥐고 병원으로 향하던 그 길은 다시 한 번 아득했다. 길을 양보하던 입장에서 양보 받는 입장이 되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배려가 더없이 감사했다. 그리고 그 끝에, 혼돈 속에서도 정확하게 길을 찾아가는 운전자분에게 시선이 닿았다.
안정을 되찾고 나서야 미처 던지지 못했던 물음이 비집고 일었다. 어떤 마음일까. 일분일초가 급박한, 나의 손끝에 환자의 안위가 달린 길을 매일같이 달린다는 것은. 어떤 하루를 살아내고, 어떤 이야기들을 가슴에 품고 계실까. 잊고 지냈던 타인의 삶에 대한 궁금증이 다시 고개를 드는 순간이었다.
호기심이 많았다. ‘백지’의 세상을 손에 쥔 청춘의 특권으로, 모든 종류의 삶을 동경하고 궁금해했다. 불 꺼진 무대에서 정확하게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는 배우들의 이야기가 궁금해 소극장에서 보조 연출로 일했다. 누가 봐도 뜨내기 외부자로 초반에는 꽤나 배척당했지만, “헤헤” 웃으며 그저 진심을 증명해 나갔다. 그렇게 내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 어쩌면 평생을 관객과 배우 이상으로는 만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르는 이들의 삶 한복판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러나, 내게 속한 세상의 색과 모양이 분명해질수록, 그 밖의 삶에는 무관심해졌다. 보이는 세상을 전부로 게으르게 오해하고 그 너머의 이야기는 알려 하지 않았다. 같은 이야기라면 최대한 효율적인 방법으로, 가장 적은 시간과 마음을 들여 나누고자 했고, 그건 대체로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돌아보니 내가 잃은 것은 ‘호기심’보다는 ‘존경’이었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수고스럽다. 그 수고스러움을 감수하고라도 귀를 기울일 때에는, 그 기저에 상대에 대한 존경이 자리하고 있을 때이다. 내 것 너머의 삶에 대한 존경. 보다 구체적으로는 타인의 삶에 대한 순수한 존경이 야기한 호기심. 삶 한복판에 비집고 들어가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시간과 마음을 들여 긴히 이야기를 청하고 싶어지는 것. 상대적 우월감 혹은 대리만족을 위해 단편적으로 소비하는 호기심과는 그렇게 구분이 된다.
출근길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핀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이야기를 상상해 본다. 각자의 세상을 감당해내고 있는 모두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아 질문을 건네고 싶어진다. 어떤 마음일까, 어떤 하루를 살아내고 있을까, 어떤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있을까. 영화 ‘타인의 삶’에서 극작가 드라이만의 삶이 감청 요원 비즐러의 삶을 변화시켰듯, 어떤 삶은 변화를 불러온다. 앞으로의 날들에서는 의식적으로라도 더 궁금해 보려 한다. 내 것 너머의 세상과 그들이 품은 이야기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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