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프랑스 샤넬 본사 회의에서 한 직원이 한 말이다. 샤넬이 가격을 올릴 것이란 소식에 한국에서 긴 구매행렬이 늘어선 게 화제로 올랐을 때다. 한국 내 여론이 이 문제로 시끄럽다고 하자 ‘그럼 너희 한국인들이 안 사도 돼’라는 오만한 어감이었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속내는 다르다. 한국 시장은 프랑스 본사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시장이 아니다. 한국과 중국으로 대표되는 아시아 시장은 전 세계 샤넬 매출 중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 특히 샤넬은 지난해 한국에서 9296억 원어치를 팔며 코로나19로 인한 글로벌 매출 감소 충격을 줄일 수 있었다.
에르메스 루이비통 샤넬, 이른바 ‘에루샤’로 불리는 3대 명품이 지난해 한국에서 올린 매출은 2조4000억 원. 집값 상승에 따른 심리적 자산버블과 주식시장 호황, 막힌 해외여행길의 3박자가 거침없는 명품 소비로 이어진 결과다. 그런데도 한국 소비자는 명품 업체들로부터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컷 팔아주고 ‘호갱님’(호구와 고객을 합친 말로 입으로는 ‘고객님’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우습게 보는 현실을 비꼰 표현) 소리를 듣고 있다.》
프랑스보다 비싼 한국의 샤넬백
명품은 위기에서 가격을 올린다. 샤넬은 대공황 때 가격을 올리면서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브랜드의 위상을 공고히 했다. 가격을 올릴수록 부유층은 ‘나는 특별한 계급’이라고 안심하고 그렇지 못한 소비자는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을 키운다.
코로나 상황에서도 명품 브랜드들은 수차례 가격을 올렸다. 원자재 가격 상승, 국가 간 환율 차이에 따른 가격 조정 등의 이유를 댔지만 실상은 초유의 팬데믹이 가져온 매출 쇼크를 만회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한국이 있다.
‘에루샤’는 코로나 이후 한국에서 공격적으로 가격을 올리고 있다. 지난달 가격 인상으로 샤넬 클래식백 라지 사이즈는 1049만 원이 됐다. 코로나 이전인 2019년 11월(792만 원)과 비교하면 24% 올랐다. 그런데 이 핸드백은 현재 프랑스에서는 7400유로, 한화로는 1016만 원이다. 같은 제품이 한국에서 33만 원 비싸다.
샤넬은 명품 수요가 높은 아시아, 특히 한국에서 인기 제품의 가격을 올려 유럽과 미국의 ‘셧다운’에 따른 매출감소를 보전한다는 전략이다. 그런데도 국내에서는 샤넬백을 없어서 못 판다. 사회 초년생들도 에르메스는 워낙 비싸 ‘넘사벽’으로 여기지만 샤넬은 할부로 무리해서라도 산다. 한 번 사면 웬만해선 가격이 떨어지지 않는 샤넬백은 MZ세대에게는 서울 강남의 ‘똘똘한’ 부동산과 같은 존재다.
日 고객 예약제 참고할 만
그런데 이렇게 비싼 핸드백을 정작 매장에서 구경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백화점 개장 전부터 건물 밖에서 줄을 서야 100번대 대기번호를 겨우 받을 수 있다. 매장 문 열 때 달려가는 ‘오픈런’ 행렬에 리셀러(되팔아 차익을 챙기는 상인)가 상당수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휴대전화 번호를 입력하고 몇 시간을 기다리다가 입장하라는 업체 측의 안내 톡을 받으면 10분 이내에 도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처음부터 대기해야 한다. 고객들은 “샤넬 사겠다고 남녀노소 허겁지겁 뛰어오는 모습이 참 모양새 빠진다”고 말한다. 긴 기다림 끝에 매장에 들어서도 인기 핸드백은 없는 경우가 많다. 허탕 친 상실감을 떨치려고 계획에 없던 다른 제품을 사서 나오면 그것이 곧 과소비다. 대부분 예약제로 고객을 받기 때문에 매장 앞에 줄 서는 일이 거의 없는 일본 사례를 참고해 개선해야 한다.
국내 고객들의 불만은 제품 애프터서비스에서 봇물이 터진다. 1000만 원짜리 가방이든 600만 원짜리 시계든 AS를 맡기거나 찾을 때에도 구매 고객과 똑같이 대기표를 받아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이 과정에서 언성을 높이거나 불쾌한 티를 내면 때에 따라 ‘우는 아이 떡 주듯’ 매장에 들여보내주기도 한다. 상황별 고객 응대 매뉴얼이 없거나 원칙대로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최근 샤넬은 멤버십 고객들의 개인정보를 털리고도 이 사실을 이틀 후에야 자사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국내에서 매출 1조 원 가까이 올리는 기업이 ‘소비자 앞에서 교만하다’는 소리를 듣는 이유다.
명품다운 사회적 기여 필요
‘에루샤’는 한국에서 유한회사 형태로 영업한다. 유한회사는 공시 대상이 아니라 실적 공개의무가 없는 점을 활용한 결과다. 하지만 매출 500억 원 이상 유한회사도 감사보고서를 내도록 지난해 법이 바뀌면서 올해 처음으로 이들의 한국 사업 내역이 공개됐다. 명품이란 이름 뒤로 더 이상 숨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최근 산업계의 화두 중 하나가 글로벌 법인세 도입이다. 여러 나라에서 장사하는 다국적 기업이 매출이 발생한 국가에서 세금을 더 내게 되는 추세다. ‘돈 번 곳에서 기여하라’는 뜻이다. 한 명품회사의 한국법인 관계자는 “기부가 적다는 비판이 있지만 한국의 품격을 높이는 사회공헌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명품산업은 자동차 산업 등에 비해 산업적 후방효과가 미미해 국민 정서를 고려한 사회 기여가 더 늘어나야 한다는 지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명품을 욕망하고 구매하는 것은 비난할 수 없는 일이다. 명품 브랜드들이 새로운 고객층의 요구를 발 빠르게 반영해 제품을 내놓는 것도 사실이다. 과거의 명품 소비가 주로 과시형이었다면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재테크가 되기도 한다.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애증의 대상이었던 명품이 새로운 소비자들과는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남성 명품매장과 짝퉁시장
서울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6층 루이비통 남성 매장. 우선 손님 대부분이 대학생 등 앳된 남성이라 놀라고, 수백만 원짜리 제품을 턱턱 사는 모습에 다시 놀라게 된다. 최근 들른 이 매장에는 루이비통이 미국 NBA와 콜라보한 옷과 스니커즈 등이 MZ세대 입맛에 맞게 구성돼 있었다. X세대 부모가 즐기던 제품의 원형에 스트리트 감성이 가미됐다. 아르바이트한 돈으로 100만 원대 스니커즈를 산 20대 남성은 “잘 신다가 질리면 되팔면 된다”고 했다. 명품 브랜드들은 젊은 소비자들이 기꺼이 지갑을 열도록 끊임없이 ‘디지털 변신’ 중이다. 루이비통은 창립자 탄생 200주년을 기념한 모바일 무료 게임까지 내놓았다.
코로나19는 젊은 세대의 소비와 투자에 대한 가치를 확 바꾸었다. 자산과 소득 양극화 속에 불안감을 느낄수록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한 방 있는 소비’를 추구한다. 하지만 이들이 큰돈 쓰는 일을 우습게 알다가 신용 리스크가 커질까 우려되기도 한다.
MZ세대에게는 짝퉁시장도 놀이터다. 서울 중구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앞에서 불법으로 짝퉁을 파는 노란 천막에는 젊은 소비자가 부쩍 늘었다. 인스타그램에 ‘플렉스’(과시)하기 위해서다. 풍경, 조명과 어우러지게 사진을 찍어 올리면 구찌 운동화도, 프라다 머리띠도 진품과 짝퉁을 분간하기 어렵다.
과거 세대에게 짝퉁은 ‘돈은 없는데 폼은 내고 싶은’ 감추고 싶은 흑역사였다. 그런데 MZ세대는 짝퉁인 걸 숨기지도 않는다. “이 가방은 진품을 사는 게 오히려 돈 아까워요.” 하지만 누군가는 이 순간에도 다른 사람이 명품을 걸친 인스타그램을 보면서 상실감에 빠질 수 있다. 빌렸다 잃어버린 가짜 목걸이를 진짜로 알고 주인공이 힘겹게 빚을 갚은 기 드 모파상의 소설 ‘목걸이’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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