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군가의 성취를 국가의 이름으로 자랑스러워하는 데 익숙하다. 방탄소년단(BTS)의 빌보드 1위는 “우리는 ‘방탄 보유국’”이라는 자랑거리가 된다.
그런 마음을 잘 알아서인지 정부는 1년 반 넘게 코로나19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K방역 모범국’이라는 자랑거리를 만들어 냈다. 다른 나라보다 확진자 증가를 잘 막아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성취가 공짜가 아니듯, K방역 모범국 유지 비용도 누군가가 고스란히 치러내고 있다.
아이가 동네 체육관에서 운동을 배우다 흥미를 잃어 몇 주 동안 나가지 않았다. 체육관에 들러 그만 다니겠다 말하고 미리 내놓은 몇 달 치 요금을 환불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너무 힘든데 제발 도와 달라”는 관장님의 사정에 마음이 약해졌다. “일단 돈은 묻어 두고 겨울방학에 다시 나갈지 고민해 보겠다” 하고 돌아서고 말았다. 그런데 며칠 뒤 체육관에서 확진자가 나왔다. 그 바람에 2주 동안 문을 닫게 됐다. 나는 아이가 체육관에 가지 않았길 다행이라고 안도하면서도 손해가 더 커졌을 관장님의 처지에 마음이 아팠다.
그런 와중에도 확진자 수가 2000명을 넘나들 정도로 늘어났다. 하지만 정부는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은 상황”이라고 후하게 평가했다. 여전히 방역 모범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최저임금 인상에 더해 일방적으로 영업제한을 감수하면서 방역 비용을 떠안아야 하는 관장님 같은 자영업자들은 ‘자영업 헬 조선’에 사는 기분일 것이다. 나는 ‘K방역 모범국’에 사는 걸 자랑스러워해야 하는가, 아니면 관장님의 ‘자영업 헬 조선’에 안타까워해야 하는가.
지난달에는 잠잠하던 확진자 수가 갑자기 늘어 사람들이 온라인 백신 접종 예약에 몰려드는 일이 있었다. 백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서둘렀다. 하루 30만 명이 사용하도록 만든 시스템에 1000만 명이 몰렸다. 예약 사이트 접속이 안 된다는 원성이 자자했다. 대통령은 “IT 강국인 한국의 위상에 맞지 않는다. 강력한 대응책을 마련하라”고 질책했다. 대통령의 질책에 여러 부처와 대기업이 문제 해결에 매달렸다.
8월 9일 드디어 차례가 와 예약 사이트에 접속했다. 몇 시간 걸려 분통이 터진다던 백신 예약은 5분도 안 돼 초고속으로 마무리됐다. 정부 부처들은 IT 시스템을 개선한 성과를 국민들에게 홍보하겠다며 한데 모여 회의를 가졌다. 하지만 정작 3, 4주 뒤여야 알맞다는 화이자 백신 2차 접종 날짜는 6주 뒤로 늦춰져 있었다. 백신 수급 문제 때문이다. 나는 ‘IT 강국’에 사는 걸 자랑스러워해야 하는가, 아니면 ‘백신이 부족한 나라’에 사는 걸 아쉬워해야 하는가. 미국에선 인터넷 예약은 고사하고 찾아온 사람 아무나 백신을 맞히고는 종이쪽지에 ‘백신 맞았음’이라 사인해준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 나라에서 누구도 스스로 ‘IT 후진국’이라 부르며 창피해하지 않는다.
‘K방역 모범국’ ‘IT 강국’처럼 대한민국에 자랑스러운 이름을 앞세우는 건 좋은 일이다. 국가에 대한 자긍심은 함께 위기를 이겨내는 원동력이 된다고 믿는다. 하지만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국가 리더들이 자랑스러운 이름 앞에만 서려 한다면 곤란하다. K방역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을 1년 넘게 치르고 있는 자영업자들에게도, 백신 부족을 걱정하며 불편을 감내하는 사람들에게도 자랑스러운 이름의 나라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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