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시대 버티게 한 낙천성[클래식의 품격/나성인의 같이 들으실래요]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24일 03시 00분


나성인 클래식음악 칼럼니스트
나성인 클래식음악 칼럼니스트
계몽시대 이후 빈은 음악사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 고전주의의 금자탑을 쌓아 올린 곳도, 슈베르트, 브루크너, 브람스의 낭만주의를 거쳐 세기말 말러, 볼프 등에 이어 마침내 쇤베르크와 신(新)빈악파가 무조주의의 시대를 연 곳도 모두 빈이었다.

숱한 음악가와 음악이 있었음에도 이 중 가장 빈다운 게 뭘까 묻는다면 빈 사람들은 주저 없이 왈츠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그 대표 음악이 요한 슈트라우스 2세(사진)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다. 빈 사람들의 ‘최애곡’인 이 작품은 오스트리아 제2의 국가로 불린다. 그래서인지 음악비평가 한슬리크는 이 곡을 “가사 없는 오스트리아의 애국가”라고 했다. 이 작품은 유명한 새해 축제인 빈 신년 음악회의 고정 앙코르곡으로 자리 잡은 뒤 세계적으로 사랑받게 됐다.

1867년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허망하게 패했다. 그 결과 미리 잡혀 있던 모든 사육제(부활절 금식 기간 시작 전의 카니발) 일정이 취소되고 만다. 특히 빈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무도회가 취소되자, 빈의 남성합창단은 원래의 바보 광대극 대신 가곡의 밤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왈츠 없이 사육제를 보내다니! 아무리 전쟁 중이라지만 빈 사람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급히 요한 슈트라우스 2세에게 남성 합창용 왈츠를 의뢰한다. 슈트라우스는 주문을 받고 가사에다 두 개로 딱딱 끊어져 나눠 부르기 좋은 멜로디를 입힌다. “빈 사람들아, 기뻐해! 서광이 비치잖아, 사육제 시작되니, 시간을 거슬러, 슬픔을 거슬러 참아보아야 다 소용없으니 즐겁게 보내자, 우리!” 이러한 가사는 과거의 영광을 잃고 서서히 몰락해 가는 빈의 정경을 반영하지만, 즐거움의 때를 포기할 수 없다는 현세적 낙천성의 표시이기도 하다.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데 예술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편 슈트라우스는 파리 박람회를 맞아 곡을 급히 써야 했는데 시간이 촉박해 합창곡으로 써 놓은 도나우 왈츠를 가사 없는 오케스트라용 왈츠로 편곡하게 된다. 그런데 이 관현악 버전이 다시 대박을 터뜨리고 만다. 우아하고 매끈하지만 동시에 친근한 민요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이 곡은 금세 명곡에 반열에 오른다. 관현악법 역시 효과적이다. 빈 왈츠는 단순한 ‘쿵짝짝’ 리듬이 아니다. 첫 강박에 무게가 실리고 뒤따르는 약박은 끌리듯 조금 늦게 떨어진다. 실제 춤 동작의 스텝을 반영한 것이다. 빈 필하모니는 이러한 움직임을 가장 잘 표현하는 악단으로 이름이 높다. 곡을 끌어가는 힘은 물론이거니와 마지막 장면에서 곡을 느리게 하고 플루트 솔로와 부드러운 호른을 통해 곡의 주제를 부각하는 것 역시 뛰어나다. 브람스가 이 왈츠를 너무나 부러워한 나머지 ‘사랑의 노래와 왈츠’라는 왈츠로 된 성악 앙상블 가곡집을 쓰게 됐을 정도다.

도나우강이 가장 푸르른 이 시절, 힘겨운 시대를 이겨내는 빈 사람들의 낙천성을 한번 떠올려 보자. 음악은 삶이 어려울 때 더 깊은 의미로 다가온다.
#낙천성#무조주의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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