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의 위로[이정향의 오후 3시]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25일 03시 00분


<36> 로버트 레드퍼드 감독의 ‘보통 사람들’

이정향 영화감독
이정향 영화감독
파헬벨의 카논 선율과 함께 시작하는 영화는 숲속의 녹음이 어느덧 단풍이 되고, 또 곧 땅에 뒹구는 낙엽 신세가 되는 걸 무심하게 보여준다. 바다같이 드넓은 미시간 호숫가의 고급 동네, 재럿 부부는 얼마 전에 보트 사고로 장남을 잃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온하고 행복해 보인다. 아내는 지인들의 파티를 꼼꼼히 챙기고, 수저통도 반듯하게 관리할 정도로 살림에 완벽을 기한다. 올해의 성탄절도 장남이 살아있던 예년과 결코 다르지 않게 보내야 한다고 벼른다. 누군가가 안부를 물으면 ‘원래 아무 일 없었잖아?’라는 듯 쾌활하게 웃는다. 남편은 이런 아내에게 맞추느라 자신의 슬픔을 꾹꾹 눌러둔다.

고등학생인 둘째이자 막내는 보트를 타다가 풍랑을 만나 형을 잃었다.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자살을 기도하고 정신병원 신세도 졌지만 가장 힘든 건 자신을 미워하는 엄마다. 차라리 엄마가 “네가 원망스러워. 한 명만 살 수 있다면 네가 아닌 형이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해주면 숨통이 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엄마는 줄곧 냉정한 채로 제대로 된 대화를 피한다. 깨물었을 때 더 아픈 손가락이 있듯이 엄마는 처음부터 장남이 좋았다. 세상의 전부였다. 장남이 사라지자 엄마의 사랑은 막내에게 가는 대신 증발해 버렸다.

감정에 철갑을 두른 듯 초인 같은 엄마지만 실은 무척 나약하다.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게 무서워서, 고통을 실감하는 게 끔찍해서 외면한다.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사건이 자신의 삶을 요만큼도 흔들지 못했다고, 그렇기에 어쩌면 그런 사고는 애초에 없었다는 듯이 태연을 가장하지만. 거짓으로 버티는 자신이 무너질까 봐 사소한 일상조차 흐트러짐 없이 통제하려 든다. 상처를 부정하는 데 급급해 하나 남은 자식의 아픔조차 헤아리지 못한다. 아빠는 가둬 놓은 슬픔이 자신과 아들과 가정을 병들게 한다는 걸 깨닫고 아내에게도 고통과 마주하길 요구한다. 상처를 인정하고 실컷 슬퍼해야 낫는다. 곪은 상처에 붕대만 덮어두면 썩어갈 뿐이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엄마는 시간을 갖고자 집을 떠난다.

마지막에 다시 카논이 흐른다. 같은 선율이 반복되며 계속 포개어질 뿐인데도 시작점이 다른 이유로 풍성하게 들린다. 우리네 인생사도 이렇지 않을까. 각자 출발점이 다를 뿐, 같은 궤도를 살아가는 우리. 카논처럼 여럿의 인생이 맞물려 조화를 이룬다. 매일 지구는 돌고, 해와 달이 뜨고, 잎이 지고 새순이 돋는다. 살다 보면 상처를 받고 고통스럽지만 우리는 초인이 아니다. 보통 사람이다. 스스로를 너무 밀어붙이지 말자. 영화의 제목이 위로로 다가온다.

#로버트 레드퍼드 감독#보통 사람들#평범함의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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