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남기 경제부총리가 이달 6일 “나라 곳간이 쌓여 가는 게 아니라 비어 가고 있다”고 말했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더불어민주당 고민정 의원이 “곳간에 곡식을 쌓아두는 이유가 뭐냐”고 묻자 답한 내용이다. 무분별한 재정 확대로 나랏빚이 1000조 원을 넘었으니 홍 부총리의 말은 맞다. 하지만 추경을 포함해 10차례나 예산을 편성한 재정 책임자가 마치 남 이야기 하듯 이런 말을 하니 황당할 따름이다. 곳간에 곡식이 쌓였다는 정치권 인식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홍 부총리는 4일 취임 1000일을 맞았다. 최장수 기록인데 곳간지기로서 역할은 낙제점에 가깝다. 홍 부총리 재임 동안 국가 예산은 정부 출범 때보다 50% 증가했다. 국가채무비율 등 나랏빚과 관련한 통계는 대부분 역대 최대를 경신했다. 그래 놓고 임기가 끝날 즈음 곳간이 비어 간다고 한다. “나는 경고했다”는 식으로 재정 악화 책임을 회피하려는 비겁함으로 비칠 수 있다.
그는 나라 곳간을 걱정한 지 하루 만에 어제는 “재정이 탄탄하다”며 말을 뒤집었다. 전날 발언에 대해 여당 의원들이 “국민을 불안하게 하지 말라”며 반발하자 말을 바꾼 것이다. 소신을 얘기했다가 입장을 번복한 게 이번뿐만이 아니다. 올해 2차 추경 논의 과정에서 전 국민 재난지원금을 반대하며 소득 하위 70% 지급을 주장했다. 하지만 정치권에 밀려 88% 지급으로 물러섰다. 이전 4차례 재난지원금 지급 때도 온전히 소신을 관철한 적이 없다.
홍 부총리는 국가 채무의 증가 속도가 빠르다고 하면서도 재정 건전성을 개선할 시점은 2023년으로 못 박았다. 책임을 다음 정부로 떠넘긴 것이다. 물론 홍 부총리만 탓할 수는 없다. 여당이 퍼주기 정책으로 나랏빚을 급증시킨 게 사실이다. 지금도 돈 풀기에 골몰하는 정치권은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런 포퓰리즘에 맞서 곳간을 지키는 자리가 경제부총리다.
대선을 앞두고 국가 재정을 쏟아붓는 선심성 공약이 넘쳐나고 있다. 다음 정권에서도 재정 건전성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봐야 한다. 홍 부총리는 지난해 나랏빚을 제어할 장치로 재정준칙을 마련했다. 느슨한 수준인데도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재정준칙을 강조하지만 이마저도 관철시킬 결기가 있는지 의문이다. ‘최장수’ 경제부총리가 오명으로 남지 않도록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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