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진영]살릴 수 있었던 여자들의 비참한 최후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9월 9일 03시 00분


가정폭력 데이트폭력 피해 여성 폭증
무심한 정부의 ‘행정 과실치사’ 아닌가

이진영 논설위원
이진영 논설위원
여자들의 사회적 위상은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집에서는 맞고 사는 여자들이 폭증하고 있다. 여성가족부가 최근 발표한 ‘2021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에 따르면 2019년 가정폭력 건수는 하루 평균 138건으로 8년 전보다 7.3배로, 데이트폭력은 하루 27건으로 6년 전에 비해 36% 늘었다. 이는 경찰의 검거 건수를 집계한 수치로 가정폭력의 경찰 신고율이 3%가 안 되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피해 규모는 가늠하기조차 두렵다. 폭력적인 남편이나 애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무직자, 구청장, 일본검 소지자, 인명구조사 등 언론에 보도되는 가해자의 면면은 다양하다.

잘나가는 여자들을 향한 못난 남자들의 용심일까. 그보다는 더 이상 맞고는 못 살겠다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긍정적인 신호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유독 가정폭력이나 데이트폭력에서 ‘미투’가 드문 이유는 다들 짐작하는 대로다. 남편이고 애인이며 애들 아빠가 아닌가. ‘보복이 두려워서’ ‘창피하고 자존심 상해서’ ‘달라질 게 없을 것 같아서’ 참기도 한다. 경찰도 미덥지 않다. 신고 전화를 하면 “제가 꼭 가야 되나요” 하고 되묻거나, 출동해서는 “형님, 술 깬 다음에 얘기하세요” “친정이나 찜질방에라도 가 계세요” 하며 발을 빼려 든다. 거리의 폭력과는 달리 ‘집안싸움’ ‘사랑다툼’인 것이다.

하지만 그 피해는 사회적이다. 미국의 가정폭력 실태를 다룬 베스트셀러 ‘살릴 수 있었던 여자들’에 따르면 가정폭력으로 인한 의료비용이 매년 80억 달러(약 9조3000억 원)가 넘는다. 폭력의 후유증으로 인한 근로시간 상실 규모는 연간 800만 시간이다. 여성 노숙인의 절반 이상은 가정폭력으로 집을 나온 경우이고, 폭력적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발달장애의 위험이 훨씬 높으며, 대규모 총격사건의 시작은 가정폭력인 경우가 많다. 세계보건기구(WHO)와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가정폭력이나 데이트폭력을 공중보건의 문제로 간주한다.

이 공중보건의 문제가 코로나19로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재택이 미덕인 시대지만 유엔에 따르면 “집은 여성에게 가장 위험한 곳”이다. 세계 각국은 집 안에 갇혀 신고 전화도 못 하고 있을 멍든 여성들을 위해 온갖 아이디어를 짜낸다. 봉쇄 상황에서도 문을 여는 약국과 슈퍼는 최적의 구조 장소다. 약을 사고 장을 보러 나온 피해 여성이 ‘마스크19’라고 암호를 말하면 직원이 알아듣고 대신 신고를 해준다. 슈퍼 안에는 간이 상담소가 있고, 구매 영수증 아래쪽엔 여성폭력 신고 전화번호가 자동으로 찍혀 나온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통씩 재난문자를 보내면서 그런 안내번호 한번 보내준 적이 없다. 참으로 무심한 행정이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2018년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이 제정되고, ‘전처 살인사건’과 데이트폭력 살인사건이 터지자 줄줄이 종합대책이 나왔지만 대부분 발표에 그쳤다. 올해 가정폭력 관련 예산은 넓게 잡아도 427억 원으로, 신설된 군 장병 이발비(421억 원) 수준이다. 대선 주자들은 ‘펫 공약’은 경쟁적으로 내놓지만 가정폭력 대책을 얘기하는 이는 드물다. 허술한 정부 통계를 대신해 시민단체 한국여성의전화가 매년 언론 보도를 토대로 ‘친밀한 관계 내 여성폭력’을 집계하는데 지난해 사망자가 115명이었다.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에서 가장 친밀한 관계인 지인들의 ‘테러’로 매년 100명 넘게 숨지는데 예방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행정의 과실치사 아닌가.

#여자#비참한 최후#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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