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 ‘올리버 색스: 그의 생애’(릭 번스 감독)를 보다 이 설명이 나오는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올리버 색스(1933∼2015)를 소개하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표현은 없을 듯했다.
색스는 의사이고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펴내는 책마다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다. 그의 글엔 사람 뇌의 비밀을 속속들이 파헤치고 싶어 하는 과학자 특유의 집요함이 서려 있다. 동시에 고통받는 인간을 외면하지 못하는 의사의 따뜻한 시선도 공존한다. 탁월한 이야기꾼인 색스는, 이 두 요소를 조화롭게 글로 풀어낼 줄 알았다. 다큐 속에서 색스의 지인들은 그가 끊임없이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환자를 만나고, 글을 썼다고 증언한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이 영화에선 색스의 또 다른 면모도 공개된다. 그는 청소년기부터 오토바이를 탔다. 수련의 시절에도 금요일 퇴근과 동시에 오토바이에 올라 주말 내내 수천 km씩 질주하곤 했다고 한다. 색스는 1961년 역도 스퀏 종목에서 캘리포니아주 신기록을 세웠다. 그의 자서전 ‘온더무브’에는 “수영을 하다 몇 번이나 죽을 뻔했다”는 대목도 있다. 이 에너지의 원천이 바로 “세상에 대한 놀라움의 감정”이었던 셈이다.
영화는 미국 뉴욕에 있는 색스의 아파트에서 시작한다. 그는 불과 몇 주 전 말기 암 진단을 받은 참이다. 자기 앞에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색스는 세상에 대한 탐험을 멈추지 않는다. 새로운 책을 쓰고자 자료를 뒤적이고, 바흐의 피아노곡을 연습한다. 색스가 장난꾸러기처럼 눈을 빛내며 주위 사람들에게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는 장면을 보다 문득 애그니스 마틴(1912∼2004)의 ‘가브리엘’(1976년)이 떠올랐다.
‘가브리엘’은 추상화가로 유명한 마틴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영상 작품이다. 카메라의 시선은 바다 앞에 선 한 소년의 뒷모습에서 시작해 대자연 곳곳으로 옮겨간다. 평화로운 숲길, 맑은 시내를 지나 바람에 휘날리는 야생화를 클로즈업할 때는 영상에서 가벼운 흔들림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 작품을 직접 촬영한 마틴은 생전 인터뷰에서 “카메라가 무겁지는 않았다. 다만 아름다운 풍경이 주는 전율 때문에 손이 떨렸다”고 고백했다.
1976년이면 화가가 이미 60대 중반에 접어들었을 때다. 회화 분야에서 큰 명성을 얻은 뒤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틴은 여전히 자연의 아름다움에 설렜고, 그 기쁨을 남기고자 새로운 도전에 나선 것이다. ‘가브리엘’ 속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소리가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이라는 점도 인상적이다. 마틴 또한 색스 못잖게 바흐를 사랑했다. 그는 이 음악을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의 환희를 표현한 듯하다.
지긋지긋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발이 꽁꽁 묶인 지 1년이 넘었다. 그래도 여전히 색스의 글을 읽고, 마틴의 그림을 보고, 바흐의 음악을 들을 수 있어 다행이다. 그들이 평생에 걸쳐 경탄한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머잖아 몸으로 마음으로 다시 느낄 수 있게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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