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천재 예브게니 자먀틴(1884∼1937)은 돈 강 유역의 작은 마을 레베i에서 정교회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문·이과 모두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그는 페테르부르크종합기술대 조선학부를 졸업한 후 볼셰비즘을 지지하는 문학 활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그의 열정은 곧 환멸로 바뀌었다. 공산주의가 추구하는 집단화와 획일화에 절망한 자먀틴은 전체주의를 신랄하게 꼬집는 공상과학소설(SF) ‘우리들’을 집필했다. 소설은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뻔뻔스러운 비난으로 간주되었고 그에게는 반혁명의 낙인이 찍혔다. 우여곡절 끝에 파리로 망명한 자먀틴은 생활고와 병고에 시달리다가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 ‘우리들’은 이후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조지 오웰의 ‘1984’ 등 무수한 소설에 영감을 주면서 현대 디스토피아 문학의 원조로 우뚝 솟아올랐다.》
첨단과학 감시사회 ‘단일제국’
‘우리들’의 배경은 참혹한 전쟁에서 살아남은 극소수의 인류가 첨단 과학기술과 절대권력을 무기로 건설하는 ‘단일제국’이다. 모든 국민은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리며 똑같은 청회색 제복을 입고 똑같은 인공 음식을 먹으며 동일한 규격의 아파트에 거주한다. 과학문명의 정점에 오른 단일제국에서 모든 비합리적인 것, 감상적인 것은 이성과 효율로 대체된다.
자먀틴의 문학성은 그가 균등사회를 묘사하기 위해 선택한 건축재료 유리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유리는 그 견고성과 투명성을 과시하며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복잡하고도 강렬한 상징이다. 단일제국의 모든 건축물은 다이아몬드처럼 견고한 강화유리로 지어져 있다. 국가 전체는 거대한 유리장벽에 의해 자연계와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고 국민은 통유리로 지어진 아파트에 거주한다. 정부가 허락해준 약간의 개인 시간을 제외하면 하루 24시간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노출돼 ‘만인의 만인에 의한 감시’가 가능해진다. “좌우의 유리벽을 통해 보이는 것은 나, 내 방, 내 옷, 수천 번 반복되어 온 나의 움직임과 같은 이웃 번호들의 모습이다.” 유리 도로에 설치된 ‘가두녹음막’은 모든 번호의 동선과 대화를 도청해 기록하고 곳곳에 침투해 있는 보안요원은 그들의 글을 조용히 수집하여 분석한다.
이렇게 철저하게 통제된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최고의 안전과 평화를 제공한다. 주인공 D-503 역시 통제와 감시와 안전에 익숙해진 삶을 살면서 단일제국의 발전을 위한 우주선 건조에 투신한다. 그러나 어느 날 I-330이라는 여성 번호가 그 앞에 나타나면서 그의 유리처럼 “매끄럽고 견고하고 행복한” 삶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여성은 그의 내면에 있는 원초적 감각을 자극하여 단일제국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본능적인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그녀는 반체제 혁명 세력의 주모자로 주인공의 우주선을 접수하기 위해 그에게 접근한 것이다. 이때부터 주인공은 통제된 행복 대신 불안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혁명의 물결에 동참한다.
현대 디스토피아 문학의 원조
‘우리들’이 씌어진 지 어느덧 100년이 지났다. 그러나 ‘우리들’은 집필 당시의 옛 소련보다 현재의 세계에 더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정치적 독법을 일단 접어 두면 소설이 품고 있는 훨씬 깊은 의미가 드러난다. 개인의 자유냐 아니면 통제가 제공하는 편의와 안정이냐―이 문제는 그 어떤 시대와 사회도 피해 갈 수 없는 딜레마다. 특히 전 지구를 휩쓸고 있는 작금의 팬데믹 상황에서 국가권력에 의한 합법적인 감시는 그 어느 때보다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감시자본주의 시대’의 저자 쇼샤나 주보프는 우리가 정보 제공에 동의할 때 빼앗기는 것은 개인정보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경험에 대한 주권”이라고 일갈하면서 “이제 그만”이라고 외칠 것을 촉구한다. 사실 훤히 들여다보이는 디스토피아 속의 투명한 유리 세계와 폐쇄회로(CC)TV 및 QR코드로 동선이 낱낱이 드러나는 우리의 세계가, 단일제국과 ‘실리콘 제국’이 겹치는 것을 모른 척하기 어렵다. 클릭과 ‘좋아요’의 숫자로 정체성이 규정되는 현대인과 소설 속의 번호들이 어딘지 닮았다는 느낌 또한 떨쳐버리기 어렵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확진자와 사망자가 속출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정보 제공에 “모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안전과 사생활 침해 간의 무게를 저울질하느라 머뭇거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점점 더 정교화되고 지능적으로 발달해 가는 디지털 전체주의에 엄중한 경고를 해온 ‘감시연구(Surveillance Studies)’ 전문가들도 대부분 비슷할 것이다.
“‘우리’ 아닌 ‘나’의 눈으로 보라”
자먀틴 역시 개인의 자유가 전체 구성원의 물리적 안녕보다 앞서야 한다는 얘기는 하지 않는다. 단일제국을 전복시키려던 봉기는 진압되고 주모자는 처형당하고 주인공은 세뇌 수술을 받아 다시 원래의 ‘온건한’ 번호로 돌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결코 암울한 미래를 예고하는 소설이 아니다. 주인공이 ‘우리’가 아닌 ‘나’로서의 자아, 번호가 아닌 살과 피를 가진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의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토록 완전무결하게 보이는 단일제국의 맨 밑바닥에서는 주인공처럼 ‘나’를 의식하는 사람들의 저항이 부글부글 끓어 넘치고 있기 때문이다. 자먀틴은 여기서 다시 유리를 소환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감시의 상징인 유리가 개인의 내면에 적용될 때 통찰의 상징이 된다. “나는 유리처럼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내부를 속속들이 볼 수 있었다. 두 명의 내가 있었다. 하나는 이전의 나, 이전의 D-503, 번호 D-503. 또 다른 하나는….” 주인공은 고뇌한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내가 정말 나인지 알 수만 있다면.” 고뇌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샅샅이 파헤치는 동안 주인공은 수많은 번호 중 하나가 되는 것에서 벗어난다. 그는 ‘우리’의 틀을 부수고 나와 처음으로 ‘나’가 된다. “나는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난생 처음 나 자신을 명확하고 분명하게 의식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여기 내가 있다.”
‘우리들’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인간이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인간을 ‘번호화’하는 권력이나 자본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감시사회를 뒤로 돌리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할 수도 없다. 문제는 노출과 기록과 감시가 점점 더 고도화되어 가는 시대에 개인이 어떻게 자신의 ‘나’를 구체적으로 의식하고 그 ‘나’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볼 것이냐에 달려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의 눈으로 감시 시스템 속의 자신을 볼 수 있다면, 또 그 눈으로 감시사회를 ‘감시’할 수 있다면 어쩌면 자유와 행복은 공존 가능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읽다 보면 ‘우리들’은 어느 틈에 공상과학소설에서 철학소설로 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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