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던 차를 자동차 대리점에 ‘믿을 만한’ 가격에 직접 팔고, 돈을 보태 바로 새 차를 살 수 있도록 하자는 논의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대기업의 중고차 판매업 진출 허용 논란 얘기다. 완성차 업계와 중고차 판매업계 등으로 구성된 ‘중고차매매산업 발전협의회’는 3개월간의 상생 협상이 결렬됐다고 9일 밝혔다. 허용 여부는 이제 중소벤처기업부 생계형 적합업종 지정 심의위원회 손에 달렸다.》
소비자 불신 쌓인 중고차 시장
중고차를 사고 싶어도 터무니없이 비싼 값을 주는 것이 아닌지 불안해 중고차 시장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중고차 시장이 판매자와 구매자 간 정보 비대칭 때문에 품질이 낮은 상품이 많은 ‘레몬 마켓’인 점도 소비자들 불안을 부추긴다.
시민단체인 ‘소비자주권시민회의’가 올해 4월 전국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80%의 소비자가 ‘중고차 시장은 혼탁하고 낙후돼 개선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허위·미끼 매물과 가격 불신, 주행거리나 사고이력 조작, 비정품 사용 등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중고차 판매업은 2013∼2019년 6년 동안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있으면서 사업권을 보호받았다. 제도의 취지대로면 이 기간 동안 중고차 판매업은 신뢰를 회복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소비자 신뢰에 문제가 있다는 점은 중고차 판매업계도 일부 인정을 한다. 지해성 한국자동차매매조합연합회 사무국장은 “소비자 불신이 여전한 점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다”라면서도 “정부가 허위 매물로 장사를 하는 불법 조직 등을 더 강력하게 단속하고 처벌해서 중고차 판매사업자가 모두 불법 사업자인 양 비치는 것은 막아줘야 한다”고 말했다. 전국에는 6200여 개의 중고차판매 사업자가 있고, 5만여 명이 종사하고 있다.
중고차 판매업은 2019년 2월 중소기업 적합업종에서 제외됐다. 법적으로는 이때부터 대기업이 진출을 해도 되는 상태다. 하지만 중고차 판매업계가 바로 중기부에 ‘소상공인 생계형 적합업종’ 지정을 요청하자 완성차 업체들은 진출을 자제해 왔다.
생계형 적합업종 지정 적합성을 먼저 살피는 동반성장위원회는 6개월의 실태 조사를 끝내고 그해 11월 중고차 판매업은 생계형 적합업종으로 부적합하다는 의견을 중기부로 보냈다. 중고차 판매업이 소득은 영세하지만 규모 면에서는 영세하지 않다고 판단했고, 대기업이 진출을 해도 점유율을 크게 높이지 못하고 있어 업종 보호의 필요성도 약하다고 본 것으로 알려졌다. 통상의 경우라면 중기부는 곧이어 심의위원회를 열고 생계형 적합업종 지정 여부를 결정해야 했지만 2년 반이 지나도록 결정을 못 내렸다.
생계형 적합업종 지정 되나
생계형 적합업종은 영세성과 보호 필요성, 산업 경쟁력, 소비자 후생 등 4가지 기준으로 판단한다. 중기부 심의위원회는 동반성장위의 의견서를 참고해 결정하는데, 제한 조건을 붙여 지정하는 방법이 나올 수도 있다.
조건부 지정이 된다면 상생협약에서 나온 양측 주장과 합의된 부분이 참고가 될 수 있다. 양측은 완성차 업계가 4년간 현재 전체 중고차 거래대수의 10%까지만 늘린다는 원칙에는 합의했다. 다만 기준을 삼을 중고차 거래 대수에서 250만 대(완성차 업계)와 110만 대(중고차 판매업계)로 큰 차이를 보였다. 중고차 판매업계는 신차 판매권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완성차 업계는 신차를 팔기 위해 소비자의 중고차를 바로 매입하기를 원했지만 중고차 판매업계는 소비자가 공용 플랫폼에 내놓으면 서로가 경매를 통해 매입하자고 주장했다.
중고차 판매업이 생계형 적합업종에 지정되면 소비자들은 제조업체가 인증하는 중고차를 살 수 있는 선택권을 갖지 못하게 된다.
대기업과 중견기업은 해당 업종 진출이 제한되면서 역차별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 이미 진출한 기업은 사업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대면 판매 등을 내세운 ‘케이카’ 등은 1조3000억 원대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수입차 브랜드들도 이미 중고차 판매 사업을 활발히 벌이고 있어 국산차 브랜드들은 더 불리해질 수 있다.
낙후된 중고차 시장 키울 기회
한국에서 거래되는 중고차 대수는 한 해 약 250만 대로 시장 규모로는 25조∼30조 원대로 추산된다. 완성차 업체들은 대기업이 진출하면 중고차 시장을 더 키울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 신차를 살 때 소비자들이 중고차로 대납할 수 있게 되면 그만큼 더 많은 중고차가 시장에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고차 판매업계는 5년 이하·10만 km 이하의 ‘좋은 물건’을 완성차 업계가 독식하다시피 하면 수익성이 크게 떨어질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이번 상생 협의에서 좌장을 맡아 중재위원 역할을 했던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공학과 교수는 “믿고 살 수 있는 중고차가 생기면 그만큼 소비자들의 관심이 커져 시장을 키우고 투명하게 하는 선순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며 “중고차 시장의 산업 경쟁력과 소비자 후생까지 폭넓게 고려해 중기부 심의위원회가 현명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美-獨 등 차 선진국에선 신차 전시장서 중고차도 산다
중고차 시장이 발달한 미국과 독일의 소비자는 신차를 사는 곳에서 중고차도 구매할 수 있다. 중고차에 대한 이력 및 시세 정보를 제공하는 업체가 많고, 정찰제도 정착돼 있어 중고차 구매에 대한 스트레스가 덜한 편이다.
대형 딜러들을 통해 신차를 판매하는 미국의 완성차 브랜드들은 전시장에 신차와 중고차를 함께 전시하고 있다. 5, 6년 안팎이 된 중고차를 사들여 100∼200여 항목을 점검하고 수리를 거친 뒤 무상보증 기간을 연장해 판매하고 있다. ‘인증 중고차’로 불린다.
미국 중고차 시장에서 인증 중고차가 차지하는 비중은 5∼6%에 불과하지만 성능점검 품질보증을 확신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미국 중고차 딜러 연합회인 ‘전미독립자동차딜러협회(NIADA)’와 대형 독립 딜러들이 자체적인 인증 중고차 사업을 도입했다.
미국 소비자들은 100년 이상의 업력을 가진 ‘켈리블루북’ 같은 업체들이 제공하는 시세와 차량 가치 정보를 바탕으로 여러 딜러들과 판매 사이트의 가격을 비교한 뒤 구매를 결정한다.
독일 완성차 브랜드들도 상태가 좋은 중고차를 대상으로 성능을 점검한 뒤 2, 3년 보증 기간을 연장해 신차와 함께 판매한다. 인증 중고차의 비중은 미국보다 높은 16∼17% 수준이다. 중고차 관련 산업이 분화해 차량 평가 및 검사·인증기관은 물론이고 잔존가치 평가 업체, 디지털 트윈과 인공지능을 활용한 디지털 차량 점검 업체, 우수한 중고차를 활용한 구독형 서비스 제공 기업 등이 있다. 중고차 시장의 활성화로 독일 중고차 시장의 거래 대수는 2019년 기준 신차 시장의 2배인 719만 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소상공인 생계형 적합업종
영세 소상공인 보호를 위해 대기업과 중견기업의 진출을 제한하는 제도. 중소기업 적합업종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자율 규제인 데 반해 이 제도는 법(소상공인 생계형 적합업종 지정에 관한 특별법)으로 규제된다. 2019년 10월 서적·신문 및 잡지류 소매업 지정을 시작으로 두부, 간장, 고추장, 된장, 청국장, 국수, 냉면, 떡볶이떡 제조업 등 9월 현재 11개 업종이 지정돼 있다. 지정 기간은 5년으로 재심의 후 연장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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