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승련]후보님, 공소장 일독을 권합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9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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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서 모시느라 일그러진 공직사회
101쪽 공소장엔 사흘간 기록 담겼다

김승련 채널A 취재윤리·멘토링 에디터
김승련 채널A 취재윤리·멘토링 에디터
수년 전 안희정 당시 충남도지사에게 “도청 공무원이 진실을 제대로 보고하느냐”고 물었다. 답변은 애매했다. “충남도 공직자들이 ‘됩니다-안 됩니다 보고서’를 둘 다 캐비닛에 넣어두고는 그때그때 꺼내오더라”고 설명했다. 준비가 잘돼 있다는 말로도 들리지만, 높은 분 입맛에 맞는 답이라면 만들어 낸다는 말이기도 했다.

대선 후보들은 요즘 내놓는 핵심 국정과제를 내용이나 절차에서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마칠 수 있을까. 대선 후보들에게 옛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등의 공소장을 꼭 구해 일독하기를 권한다. 대통령의 탈원전 국정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청와대, 산자부, 원전 공기업(한국수력원자력)의 뜻이 어떻게 일그러지고 타협되는지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미래 대통령으로서 내가 임명한 장관과 청와대 참모들이 내 입맛에만 맞춰 캐비닛에서 정책보고서를 꺼내올지 궁금하다면, 또 걱정된다면 말이다.(7000억 원을 들여 수명을 10년 늘렸던 월성 1호기는 문재인 정부 출범 후 “계속 가동할 경제성이 없다”는 평가를 받은 뒤 조기 폐쇄됐다. 현재 검찰은 회계법인의 경제성 평가보고서 조작 혐의를 수사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 초 청와대 보고망(이지원)에 댓글을 달았다. “월성 1호기 영구 가동중단은 언제 결정할 계획인가요.” 형식만 질문이었을 뿐 강력한 지시였다. 대통령도 산자부가 100년 에너지정책을 이렇게 빨리 180도 바꿀 줄 몰랐을 것 같다. 공소장에 따르면 딱 이틀 걸렸다.

산자부의 정책전문가와 한수원의 기술전문가는 임기 초만 해도 의지가 굳었다. “월성 1호기를 가동중단하면 손실 1조8000억 원이 발생한다”고 청와대에 보고했다. 신중한 탈원전 건의는 4차례 이어졌다. 청와대가 탈핵-탈원전을 밀어붙이자 독일 사례를 따라 국회의 입법이란 형식을 갖추자는 수정 제안도 실무선에선 내놓았다. 이랬던 공직사회도 대통령 댓글을 발견한 뒤론 신념을 접었다. 시인 김수영의 표현처럼 공직자라는 이름의 풀은 비를 몰고 온 동풍 앞에 누웠고, 울었고, 다시 누웠다.

산자부 출신 청와대 산업정책비서관은 댓글 당일(월요일)에 “대통령 하문(下問) 내용을 빨리 산자부에 전달하고 장차관 생각을 반영한 보고를 해 달라”며 움직였다. 본인은 부인했지만 산자부 장관이 “너 죽을래”라며 담당 과장을 압박했다는 것이 화요일이다. 그리고 수요일, ‘조기 폐쇄’ 보고서가 장하성 정책실장의 손을 거쳐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이런 구구한 과정이 공소장에 담겨 있고, 앞으로 대전지법 재판에서 다투게 될 것이다. 검찰은 관련자 발언, 메모를 인용해 공소장에 상세히 기록했다. 국정책임자에겐 절대 보고되지 않는 공직사회의 부끄러운 속살이다. 대선 후보들은 신문 제목 훑듯 넘어가선 안 된다. 또 결과만큼이나 과정이 중시되는 지금, 절차를 못 갖춘 정책 밀어붙이기로 얼마나 아까운 공직자들이 재판을 받고 있는지 리더라면 챙겨야 하지 않을까.

사족. 일독을 권하긴 했지만, 101쪽에 이르는 공소장은 대선 후보가 손쉽게 입수하지 못할 수 있다. 법무부는 국회가 요구하더라도 비공개 원칙을 바꿀 생각이 없다. 현재 원전 관련 단체가 ‘문제의 원전 공소장’을 갖고 있으나 입수 경위가 명확하게 밝혀진 적은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부 시민단체들은 ‘공소장 낭독회’라는 듣도 보도 못한 행사를 열어 권력 핵심부에서 벌어진 뼈아픈 수사기록을 바깥에 알리고 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의 단면이다.

#대선 후보#일그러진 공직사회#공소장 일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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