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미국 동부 뉴저지의 항구. 불우하게 자란 청년 테리는 한때 촉망받는 권투 선수였으나 형의 부탁으로 승부조작에 가담한 탓에 지금은 일용직 부두 노동자 신세다. 그래도 형이 노조위원장의 오른팔인 덕에 편하다. 위원장 일당은 노조지부를 강탈한 후 불법과 비리를 일삼으며 자신들을 고발하는 노조원은 단칼에 제거해 왔다. 노조원들은 타살을 자살로 위장하는 노조에 반기를 들지 못한다. 매일 상납금을 바쳐야 일거리를 얻을 수 있고 임금도 많이 뜯기지만 입에 풀칠하기가 바쁜 그들로서는 노조의 횡포를 견디는 수밖에 없다. 테리는 노조가 내부고발자를 살해하는 데 본의 아니게 일조하지만 노조를 위한 일이었다며 자신을 합리화한다.
20대 때 국제 운동 경기를 촬영한 적이 있다.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종목이었는데 우리나라 선수와 메달을 다투는 외국 선수의 집중을 방해하고자 그의 옆에 몰려가서 촬영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우리는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 주저 없이 행했고, 그 덕인지는 모르나 우리나라 선수가 메달을 땄다. 내 공도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내가 훌쩍 커 보이고, 자랑스러웠다.
자기편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부정도 감수하며 거짓을 진실로, 진실을 거짓으로 둔갑시키는 이들을 보며 ‘창피하지 않을까? 저런 짓을 하는 자신을 어떻게 용납할까?’라고 의아해하지만 실은 나도 겪어봤다. 양심의 가책은커녕 우리 편을 위한다는 생각에 뿌듯하다. 확장되는 존재감과 연대감 속에서 보람도 느낀다. 자기 때문에 망가지는 다른 인생들은 안중에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부끄러운 자신을 마주할 것이다. 내 자신이 끔찍하게 무서웠던 건, 단 한 번도 그 외국 선수의 처지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테리는 자신들의 비리를 감추려고 연달아 살인을 저지르는 노조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어서 위원장을 고발한다. 하지만 테리에게 돌아온 건, 동료들의 차가운 시선과 따돌림이다. 테리처럼 일자리를 잃을까 봐 두려워서, 자기들을 위해서 총대를 멘 테리를 버리고 노조 편에 선다. 하지만 테리가 위원장과 맞짱을 뜨며 주먹을 휘두르자 동료들은 변한다. 영화의 마지막, 테리의 뒤를 따르는 동료들의 행렬은 감동적이지만 어찌 보면 그들의 변화는 정의감보다는 현실적인 계산으로도 보인다. 누구 편에 서야 할지를 잘 아는. 엘리아 카잔 감독은 한때 공산주의자였으나 당원인 동료들이 자신들이 외치는 구호와는 달리 가난한 영화 스태프들을 착취하는 것을 보고 환멸을 느껴 전향했다. 공산주의자 색출 작업을 도왔다는 이유로 친구도, 동료도 잃었다. 실화에 기초한 시나리오는 제작사들이 노조의 눈치를 보며 기피한 탓에 어렵게 영화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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