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 의원 겸직 법무장관의 아슬아슬한 입[오늘과 내일/장택동]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9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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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급한 발언은 중립성 논란 불러올 뿐
정체성 분명히 하고 본분에 충실해야

장택동 논설위원
장택동 논설위원
지난해 11월 9일 당시 윌리엄 바 미국 법무장관(미국에선 검찰총장을 겸한다)은 연방검사들에게 ‘부정 선거 관련 수사를 허락한다’는 취지의 서한을 보냈다. 대선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있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돕기 위해 ‘트럼프의 충신’으로 불리던 바 장관이 나서자 선거 범죄를 담당하는 법무부 간부는 사표를 던졌다. 검찰의 정치화를 우려하는 여론이 들끓었고 수사는 유야무야됐지만 바 장관은 지금도 미 언론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대선 무렵이 되면 수사기관에 외풍이 몰아치곤 했다. 이를 놓고 법조계에서는 ‘검찰의 계절이 왔다’고 표현해 왔는데 올해는 ‘법무부의 계절’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단연 눈에 띈다. 그동안 “나는 법무장관이기에 앞서 기본적으로 여당 국회의원”, “(검찰총장 인선 기준은) 대통령의 국정 철학에 대한 상관성” 등의 발언으로 눈총을 받았던 박 장관이 이른바 ‘고발 사주’ 논란에서 전면에 나서는 모양새다.

국회 법사위에서 긴급 현안질의가 열린 9월 6일은 검찰이 기초 조사단계인 진상조사를 사흘 남짓 진행했던 시점이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기도 해서 법무장관이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박 장관은 달랐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손준성 전 대검 수사정보정책관에게 고발을 지시한 것이냐’는 취지의 질문에 “수사정보정책관은 (검찰총장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가장 가까운 관계”이고 “그것을 넘어서서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이상의 관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단언했다.

법무장관은 추측이나 주장이 아닌, 법적 의미가 있는 팩트를 말하거나 그럴 수 없으면 침묵해야 하는 자리다. 그렇다면 박 장관의 발언은 ‘윤 전 총장과 손 검사의 관계에서 법적 문제가 발견됐다’는 의미로 해석돼야 할 텐데, 그럴 만큼 탄탄한 조사가 이뤄졌던 상황이었는지 의문이다. 설령 그렇다 해도 법무장관이 모호한 방식으로 언급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박 장관 스스로 “수사 동력 확보를 위해 여론몰이식으로 흘리는 행위를 좌시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흘 뒤 국회 예결위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사건은 가정적인 조건하에 법률 검토를 해 봤더니 다섯 개 이상의 죄목에 해당할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법을 다루는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통상 가정을 전제로 발언하지 않는다. ‘가정적인 조건’이라고 하면 못할 말이 없는데, 듣는 사람의 머리에는 ‘가정’은 잊혀지고 ‘혐의’만 남기 때문이다.

장관과 의원을 겸하는 게 가능한 시스템에서 이 정도는 용인될 수 있는 수준이라는 견해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근간인 법치를 지키려면 수사기관의 정치적 중립이라는 토대 위에서 정치와 형사사법이 명확하게 분리돼야 한다. 국제적 헌법자문기구 베니스위원회가 “다수의 횡포는 기소를 억압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으로 확장될 수 있다”고 지적한 것처럼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수사기관의 중립은 위협받을 수 있고, 정치적 격동기에는 더욱 취약하다.

고발 사주 논란은 중립성이 담보된 수사를 통해 잘못이 드러난 사람이 법적·정치적 책임을 지는 것으로 마무리돼야 한다. 대선을 앞두고 쏟아질 고소·고발 사건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법무장관이 수사기관의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방패가 되지는 못할망정 아슬아슬한 발언으로 논란의 단초를 제공해서야 되겠나. 여당 의원인지, 법무장관인지 박 장관이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할 시간이 왔다.

#국회 법사위#법무장관#아슬아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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