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고하는 이의 고충[이재국의 우당탕탕]<58>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9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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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
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
어느새 나이를 먹고, 선배가 되니 찾아오는 후배들이 많아졌다. 나도 내 인생을 잘 모르겠고 여전히 빌빌거리며 살고 있는데, 고민이 있다는 후배들을 못 오게 할 수도 없었다. 만난 김에 소주나 한잔 사주고 대충 얘기나 들어주고 보내려고 했는데 고민을 듣다보면 그럴 수가 없다. 그렇게 충고 아닌 충고, 격려 아닌 격려를 해주다 보니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경우가 많았다.

한 후배 녀석은 회사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찾아왔기에 좀 쉬면서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가지라고 했다. “불 끄는 방법은 강 건너에 있는 사람이 제일 잘 아는 법”이라고까지 말하며 한 발짝 떨어져서 보라고 조언을 해줬다. 고맙다며 술도 잘 얻어 마시고 갔는데 1년 후 다시 찾아와 한 발짝 떨어져 있었더니 회사가 더 힘들어졌다고 하소연했다. 그리고 은근히, 내가 아는 회사에 취직시켜 달라는 부탁까지 했다. 나는 그럴 위인이 못 된다고 해도, 내가 더 노력하지 않는다며 서운해했다. 이 정도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내가 다른 사람은 도와주고 자기는 안 도와준다고 떠들고 다니고, 만나기만 하면 나 때문에 자기가 힘들어졌다는 듯 얘기했다. 그렇게 중요한 인생의 결정을 내 말 한마디로 정했다니, 미안하다! 주제넘게 조언하고, 주제넘게 참견해서 정말 미안하다.

최근 연락이 온 후배는 배우를 하던 녀석이었다. 얼굴도 잘생겼고, 연기도 잘하고, 인성도 바른데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는다고 했다. 가정 형편도 어려워 밤낮으로 알바를 하며, 오로지 좋은 배우가 되겠다는 각오로 버티던 녀석이었다. 하루는 그 녀석이 “형, 솔직하게 얘기해 주세요. 저 뭐가 문젠가요?”라고 질문했다. 해줄 말이 없었다. 좋은 조건을 다 갖췄다고 꼭 유명한 배우가 되는 것도 아니고, 연예계에는 운이라는 것도 필요한데 그걸 억지로 만들 수도 없고, 곧 50이 되는 후배에게 “조금만 더 참고 견뎌라”라는 말도 하기 힘들었다.

결국 나는 “어쩌면 이 길이 아닐 수도 있다. 포기하지 말되, 실망도 하지 말자”는 조언으로 그날 술자리를 마무리했다. 후배는 그날 이후에도 알바를 하며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며칠 전 오전 8시에 전화가 왔다. “형, 나 오디션 합격했어요. 어제 합격 소식 듣고 너무 기뻐서 그런지 몸이 아프더라고요. 약 먹고 일찍 자고, 일어나자마자 형한테 전화했어요. 형이 ‘이 길이 아닐 수도 있다’고 했을 때 울고 싶었는데, ‘실망하지 말자’는 말에 힘내서 버텼어요. 고마워요 형! 저 진짜 잘해볼게요.”

식전부터 눈물이 쏟아졌다. 저렇게 기뻐하고 감격에 겨워하다니, 해준 것도 없는 나한테 고맙다니. 충고랍시고 해주고 본전도 못 건진 경우가 많은데, 자기 힘으로 잘 버티고 이겨낸 게 대견했다. “정말 축하한다! 오늘 저녁에 삼겹살에 소주나 한잔하자! 형이 축하주 살게!” 그 녀석에게 전화를 했다. 녀석은 대답했다. “형! 저 다음 달부터 촬영이라 몸 만들어야 돼서 술 못 마셔요! 마신 걸로 할게요!” 그래 아무려면 어떠냐, 내 조언이 1%라도 도움이 됐다면 나는 감사하다.

#충고#나이#고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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