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 흥선대원군의 10년 권력이 끝나가던 1873년 겨울, 일본에서도 메이지정부의 운명을 가를 거대한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메이지유신의 영웅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정한론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1868년 메이지유신 발발 후 일본은 조선에 신정부 수립을 알리고 국교를 새로 맺을 것을 요구해왔다. 조선은 일본의 갑작스러운 요구가 1609년 체결한 기유약조 체제에 반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일축했다. 그런 갈등이 이미 5년을 넘고 있었다. 부산에서의 교섭과정에서 들리는 양측의 갈등 소식은 안 그래도 전쟁을 바라던 사무라이들을 자극했다. 사이고는 이에 올라탄 것이다.》
그해 7월 사이고는 정부 실력자이자 도사번(土佐藩)의 총수였던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에게 이렇게 말한다. “군대를 파견하면 조선 측에서 반드시 철수를 요청할 것이고 우리 측에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면 전쟁이 발발하게 될 겁니다. 따라서 사절을 먼저 파견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면 조선이 (사절에 대해) 폭거를 일으킬 것이 분명하므로 전쟁의 명분도 생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사절을 파견하면 잡아 죽일 것이 예상되므로 부디 저를 보내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 죽는 것 정도는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학자 중에는 사이고는 자기가 서울에 직접 가서 조선과의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조선 도발로 전쟁 추구하던 사이고
그러나 8월에 역시 이타가키에게 보낸 서신을 보자. “전쟁을 곧바로 시작해서는 안 되고, 전쟁은 2단계가 되어야 합니다. … 사절을 잡아 죽일 것이 틀림없으므로 그때는 천하 사람들이 모두 조선의 죄를 토벌해야 한다고 할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내란을 바라는 마음을 밖으로 돌려 나라를 흥하게 하는 깊은 전략입니다. … 저를 보내주신다면 반드시 전쟁으로 연결시키겠습니다.”(‘자유당사’ 상) 이를 보면 사이고의 진의는 평화적 해결이 아니라, 사절 파견으로 조선을 도발해 전쟁의 명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내란이 폭발하기 전에 그 에너지를 조선으로 돌리려고 했던 것이다.(이원우, 사이고 다카모리와 ‘정한론’) 메이지유신 직후 기도 다카요시가 보였던 인식 그대로다.(8월 20일자 본 칼럼 참조)
이런 인식은 수뇌부뿐 아니라 하급 관료 사이에서도 만연해 있었다. 당시 외무성 관리로 부산 왜관을 오가며 조선과 교섭하던 사다 하쿠보(佐田白茅)는 “지금 일본은 병사가 많아서 걱정이지 적어서 걱정이 아닙니다. 각지의 병사들이 무진전쟁(戊辰戰爭·막부 토벌 전쟁)에 만족하지 못하고 전투를 좋아하며 내란을 생각합니다. 조선을 공격하는 것이 병사들의 울분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요. 조선과 싸움으로써 우리 병사들을 훈련하고 황위(皇威)를 해외에 빛낼 수 있느니 어찌 신속하게 공격하지 않겠습니까”라며 30개 대대를 동원하면 50일 내에 정복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현명철, ‘메이지유신 초기의 조선침략론’)
혁명지도자 절반 서구 시찰 나서
그러나 당시 일본은 반쪽짜리 정부가 다스리고 있었다. 1871년 폐번치현(廢藩置縣)을 단행하자마자 정부 실력자의 반이 조약개정과 서구문물 시찰을 위해 구미로 떠나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유명한 이와쿠라 사절단인데, 사이고의 죽마고우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가 그 주역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도 사절단에 끼어 있었다. 혁명 초창기 아직 정권이 불안할 때인데도 혁명지도자의 반이 일본을 떠나는 모험을 감행했으니, 이들이 국제관계와 해외정보를 얼마나 중시했는지 놀라게 된다. 일본을 떠날 때 오쿠보는 사이고에게 중요한 정책들은 사절단이 귀국할 때까지 시행하지 말라는 부탁을 했고 사이고도 승낙했다. 이른바 ‘잔류정부’다.
그러나 잔류정부는 징병령, 양력 채용, 지조개정(地租改正), 학제(學制) 반포 등 획기적인 정책들을 연속적으로 시행했다. 이 질풍노도의 시기에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사절단 멤버들도 대체로 동의하는 정책들이었기에 묵인했다. 그런데 마침내 도저히 좌시할 수 없는 소식이 유럽의 사절단에 날아들었다. ‘정한론’, 즉 조선침략을 감행한다는 것이다. 오쿠보가 보기에 이는 매우 위험한 전쟁이었다.
즉각 귀국한 오쿠보는 사이고의 기도를 분쇄하기 위해 나섰다. 유신의 영웅, 사무라이들의 두령 사이고와의 싸움이니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아들에게 유서를 써놓고 한판 승부에 나섰다. 이와쿠라 도모미는 귀국 즉시 정부에 복귀했지만 오쿠보는 이를 거부한 채 정부 밖에서 궁중공작을 시작했다. 메이지유신 때 왕정복고 쿠데타를 주도했던 이와쿠라-오쿠보 라인의 재가동이다. 사이고의 서울파견은 각의를 거쳐 태정대신(太政大臣) 산조 사네토미(三條實美)가 메이지 천황에게까지 보고한 상태였으니 거의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이를 뒤엎기 위해 산조를 맹렬히 압박했다.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산조가 병으로 쓰러지자 이와쿠라가 냉큼 태정대신(대리) 자리에 올랐다. 당시 21세에 불과했던 메이지 천황은 오쿠보와 이와쿠라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내란 빌미 된 정한론 논란
서울파견이 무산되자 내일이라도 ‘조선정벌’에 나설 듯이 신났던 사무라이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방치하면 내란을 피하고자 했던 정한론이 도리어 내란의 빌미가 될 판이었다. 사이고는 급거 사쓰마의 가고시마로 낙향했다. 그 휘하의 병력이 대거 그를 따라가 천황의 근위대가 텅텅 빌 지경이 되었다. 이 정한론 정변으로 오쿠보는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지만, 커다란 숙제가 생겨버렸다. 바로 ‘재야인사’ 사이고 다카모리다. 그 결판은 1877년 서남전쟁(西南戰爭)에서야 났다.
일본은 사이고의 감정보다는 오쿠보의 이성을 택했다. 10개가 넘는 구미열강들의 부강을 목격한 오쿠보에게 일본은 아직 어린애였다. 쇠약해졌다고는 하나 인구 1500만의 조선을 굴복시킬 힘이 일본에는 아직 없었다. 청이나 구미열강이 개입하면 또 어떻게 당해낼 것인가? 실제로 22년 후인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요동반도를 조차하려 하자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개입해 이를 무산시켜 버린 걸 보면(삼국간섭), 오쿠보의 우려도 기우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만일 정한론이 실행되었다면 메이지 정부는 그 와중에 붕괴했을 거라고 보는 역사학자들이 많다. 물론 그 과정에서 조선은 참화를 겪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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