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추석은 가장 쓸쓸하게 보낸 명절이었다. 결혼하고 추석 때마다 경기 여주에 있는 아내의 외할아버지 집에 가곤 했다. 그곳에 가면 식구들이 모여 좋은 분위기가 형성됐다. 집이 강가에 있다 보니 캠핑 느낌도 들었다. 그때마다 양고기를 준비한 나는 식구들과 함께 바비큐 파티를 열고 밤늦은 시간까지 떠들면서 캠프파이어를 했다.
그 외할아버지가 이제 안 계신다. 외가에는 이제 외할머니만 계신다. 그리고 코로나19 4단계 방역 정책 때문에 가족이 모두 모일 수 없게 됐다. 추석 저녁이면 가족들이 모두 모여 시골집 거실부터 부엌까지 빈틈없이 꽉 차 있었지만, 올해는 그냥 다른 식구들이 없는 시간을 찾아 외할머니께 인사드리고 서울로 왔다. 그래서 너무 쓸쓸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한국에서의 첫 추석도 기억난다. 필자는 2004년 9월 초 한국에 도착한 뒤 바로 대전으로 향했다. 원래 한국에 온 목적은 한국과학기술원, KAIST에서 공부하는 것이었지만 당시 한국어가 부족해 어학당도 함께 다녔다.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어학당 첫 수업을 마치고 다시 대전의 학교로 돌아오자마자, 동료 유학생들과 함께 단체버스를 타고 대전시청의 한 건물로 안내됐다. 그곳에는 대전에서 활동 중인 우리와 같은 외국인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우리가 서로 자기소개를 한 뒤에 누군가 나와서 강연을 했다. 당시 나는 한국어도 영어도 알아듣지 못해서 도대체 무슨 일인지, 무슨 행사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러자 내 옆에 있는 같은 터키 출신 룸메이트가 영어를 좀 알아듣고 상황을 대충 설명해줬다. “알파고, 다음 주 초부터 추석이라는 한국인들의 민족 명절이 있나 봐. 그래서 우리 같은 외국인을 모아서 그 명절에 대해서 강연하는 모양인데, 이 명절에는 저 과자를 먹어야 된대. 나도 뭔지 모르지만 일단 가서 그 과자 먹자!” 우리는 그러고 나서 예쁘게 준비된 송편을 먹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아, 운 좋다! 한국에 오자마자 한국인의 명절을 경험할 수가 있었네!” 했다. 막상 추석이 되자 학교도 문을 닫고 대전에 아는 사람도 없어서 룸메이트와 함께 서울로 이동해 터키 친구들을 만나서 놀자고 제안했다. 그러곤 바로 서울로 가서 터키 친구들과 추석을 보냈다. 신기한 것은, 당시 그 친구들 중엔 한국에 온 지 5년 이상 된 이들도 많았는데 아무도 추석의 의미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들 이름만 알 뿐, 왜 한국인들이 이 명절을 아직도 특별한 날로 보고 있는지는 몰랐다. 당시 나는 5년이나 살았던 외국인들이 어떻게 그 나라의 대표적인 명절의 의미를 모를 수가 있나,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나는 한국에서 18번째 추석을 맞았다. 그사이 세계에서 한국의 영향력은 많이 커졌다. 이번 추석 연휴에는 뭘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양고기를 사러 이태원으로 가기로 했다. 거기에서 우연히 한국 웹드라마 ‘오징어게임’의 광고를 보게 됐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도 ‘오징어게임’이 화제였다. 넷플릭스에서도 1위를 기록했다는 기사를 보고 한국 콘텐츠의 힘을 느낀 듯해서 기뻤다. 그렇게 이러저러한 SNS 포스팅을 보다가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텅 비어있는 유엔 총회장에서 기조연설을 하는 사진을 보고 마음이 다시 쓸쓸해졌다. 사실 다른 나라 정상들도 총회에서 연설하면 거의 비슷한 분위기지만, 미국과 같은 강대국 리더들과는 확실히 차이가 나긴 했다. 물론 방탄소년단도 유엔에서 활동하는 바람에 쓸쓸한 마음이 줄었지만 말끔하지만은 않은 기분이었다.
이런 복잡한 기분을 달래준 게 주미 대한민국대사관의 공식 트위터 계정 포스팅이었다. 대사관이 공유한 게시글은 민족 명절인 추석에 대한 홍보가 많았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아직 세계 많은 이들이 추석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또 K팝, K드라마의 인기뿐 아니라 K명절에 대해서도 많은 세계인이 알게 될 때 비로소 진짜 한국의 영향력이 커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오늘날 기독교를 믿지 않는 수많은 나라에서도 크리스마스는 명절이나 공휴일로 인정받는다. 그 배경에는 미국과 영국의 외교·문화적 영향력이 있다. 중동 국가들도 이슬람 명절을 외교에 잘 활용하고 있다. 그럼 점에서 보면, 이제는 한국도 ‘K명절의 시대’를 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크리스마스나 라마단 명절처럼 추석이면 전 세계인들이 무슨 명절이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게 되는 그날까지 여전히 더 많은 외교·문화적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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