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다음 총리를 뽑는 집권 자민당 총재 선거를 두고 일본인 지인은 이렇게 말했다. 2018년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 지난해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가 출마했을 때처럼 압도적인 ‘1강’ 후보가 없기 때문이다. 자민당 총재 선거에는 4명의 후보가 출마했다.
그중 당선 가능성이 높은 후보 2명은 한국과도 관계가 깊은 인물이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전 자민당 정무조사회장과 고노 다로(河野太郞) 행정개혁담당상은 모두 아베 정권에서 외상을 맡아 각각 한일 위안부 합의와 강제징용 배상 판결 등 과거사 문제에 관여한 바 있다.
한일 양국 관계에 대한 이들의 속내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최근 열린 자민당 전당대회에서 기시다를 만났다. “(외상 출신으로서) 한일 관계 해법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정부 간 관계만 보면 답이 나오기 힘들다. 외교는 ‘정부 사이드’만 있는 게 아니다. 문화 스포츠 등 분야에서 자주 만나 (우호적) 분위기를 쌓아야 양국 분위기도 부드러워진다”고 했다. 그는 올해 3월 10년 만에 열린 축구 한일전도 언급하며 “한일 스포츠 경기도 더 자주 해야 한다. 한일 간 민간 외교는 중요하다”고 했다. 과거사 문제를 언급하며 “한국이 해법을 가져오라” “국제법을 지켜라” 등의 주장을 되풀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총재 선거 출마 선언 이후의 모습은 많이 다르다. 18일 열린 토론회에서 그는 한일 관계 해법에 대해 “(한국이 위안부 합의를) 지키지 않으면 어떤 약속을 해도 미래가 열리지 않는다. 한국이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며 아베·스가 내각의 공식 입장을 되풀이했다. 그의 정책집 ‘기시다 비전 분단에서 협력으로’를 보면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와 관련한 부분에서 한국이 합의를 이행하지 않았다며 “솔직히 화가 난다”는 표현도 나온다.
고노도 다르지 않다. 2년 전 외상 시절 동아일보와 인터뷰 당시 미국 조지타운대 유학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부터 식사 대접을 받았다며 한국에 친근하다는 속내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최근 발간한 정책집 ‘일본을 앞으로 전진시킨다’에서 그는 근린외교 부문에 한국을 언급하지 않았다. 10일 그의 공식 출마 기자회견 때 기자는 한국을 비롯한 외교 비전에 대해 물었지만 한일 관계는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 등 국내 현안이 산적한 상황에서 당장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한일 관계를 언급해 봐야 선거에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자민당 최대 파벌인 호소다파와 이 파벌에 영향력이 큰 아베 전 총리 등 ‘한국 때리기’에 앞장서는 보수세력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속마음도 읽힌다. 기시다는 아베 전 총리의 사학 관련 비리에 대한 재조사 필요성을 제기했었고, 고노는 자민당이 반대하는 탈원전 정책을 지지해 왔는데 출마 선언 이후엔 이를 뒤집는 상황이다.
외상 출신의 일본 총리가 나와도 한일 관계가 개선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총리 관저 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한 인사는 “아베 전 총리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파벌과 극우세력 눈치 보기로 소신이 사라진 일본 정치. 이것이 ‘그렇게 흥미진진한’ 선거의 모습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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