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용왕이라 하면 민간신앙의 대상 정도로 여겨지지만 고대사회에선 국왕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강고한 존재로 자리 잡고 있었다. 고대인들은 용이 바다와 못, 심지어 우물 속에도 있다고 여겨 그곳에 제물을 바치고 소원을 빌었다. 신라 문무왕이 죽음을 앞두고 사후에 용이 되어 동해를 지키겠다고 유언한 점에서 볼 수 있듯이 용은 호국의 신으로도 존숭 받았다.
다만 용왕에게 올리는 제사는 흔적이 남지 않는 행위이다 보니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전해지기 어렵다. 그런데 30년 전, 백제가 주도하고 동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참여한 바다 제사의 흔적이 우연히 발견됐다. 그 이후 주로 못이나 우물에서 고대 제사의 흔적이 속속 드러났고 그 속에서 용왕께 지낸 제사의 사례도 확인됐다. 옛사람들은 왜 용왕께 소원을 빌었고 또 어떤 제물을 바쳤을까.
○ 변산서 함께 제사 지낸 세 나라
1991년 12월, 국립전주박물관 연구원들은 패총을 찾으려고 전북 부안 죽막동 일대에서 지표조사를 벌였다. 해안선을 따라 걷다가 발길이 죽막동 해안 절벽 위에 다다랐을 때 유병하 학예사의 눈에 토기 조각 몇 점이 스치듯 들어왔다. 군부대가 작전용 교통로 공사를 하던 중 유적이 훼손되면서 토기 조각들이 드러난 것이었다. 토기는 이웃한 대나무 숲까지 흩어져 있었다.
연구원들이 대나무 숲속으로 들어가 꽃삽으로 바닥을 조금 긁어내자 다량의 백제 토기 조각과 함께 자그마한 석제품이 출토됐다. 오키노시마(沖ノ島) 등 일본 제사 유적에서 종종 출토되는 것과 유사했으며 끈에 꿰어 성스러운 장소에 매달던 물품으로 추정된다. 이듬해 국립전주박물관이 정식 발굴을 시작하자 3세기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바다 제사의 흔적이 차례로 드러났다. 유물 가운데 백제 토기가 가장 많았고 대가야 토기와 철기, 왜에서 만든 토기와 소형 석제품, 그리고 중국 남조 청자 조각이 출토됐다.
백제 땅이던 변산반도 절벽 위에 왜 여러 나라 물품이 함께 묻힌 것일까. 다량의 백제 토기와 함께 항아리에 담긴 대가야 유물, 다양한 종류로 구성된 왜의 석제품을 보면 적어도 백제 대가야 왜 등 세 나라 사람들이 함께 제사를 지낸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학계에선 풍랑이 거세기로 유명한 죽막동 앞바다의 높은 파도를 잠재우고 바닷길의 안녕을 빌기 위해 평소 그 길을 이용하던 세 나라 사람들이 함께 모여 용왕께 제사를 거행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 연못 속 용왕께 바친 제물
2005년 2월, 경남문화재연구원 조사원들은 경남 창녕의 화왕산 해발 739m 정상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연못 내부를 조사해 유적의 성격을 해명해볼 참이었다. 네모난 연못 한 변 길이는 14m 정도였고 내부에 진흙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통상 연못은 오랫동안 사용되므로 어떤 유물이 어느 층위에서 출토되는지를 살펴가며 조사를 진행했다.
상층에선 백자 조각, 상평통보, 비격진천뢰 등 조선시대 유물이 출토됐고 하층에선 차를 갈던 다연, 철제 마구, 쇠솥, 목제품, 부적이 담긴 항아리 등 신라 유물이 다량 출토됐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목제품이었다. 길이가 49.1㎝로 길쭉하고 한쪽이 둥글게 가공되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놀라운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한 면엔 거친 붓 터치로 그려진 반라(半裸)의 여인상이, 다른 면에는 붓으로 쓰인 글자가 빼곡했다. 묵서 가운데 용왕(龍王)이란 두 글자가 선명했다. 정수리, 목, 몸통의 급소 6곳에 홈을 낸 다음 금속제 못을 박았던 흔적들도 확인됐다.
연못 하층의 여러 유물에 대해 학계에서는 9세기 무렵 거행된 기우제의 제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다만 목각 여인상의 성격을 둘러싸고는 논쟁이 벌어졌다. 연못 속 용왕에게 바친 인신희생의 대용품으로 보기도 하고, 특정 여성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만든 분신으로 보기도 한다.
○ 우물 속에서 발견된 아이 두개골
2000년 10월, 국립경주박물관 정원에서 9세기 신라의 궁궐 우물이 발굴됐다. 입구 지름이 1m 정도에 불과해 처음에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고 깊이도 깊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며칠을 파내려가도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우물 속에 쪼그려 앉아 당시 조사에 참여했던 필자는 약 8m 깊이에 다다랐을 때 까무러치게 놀라 우물 벽을 기어오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토기를 노출하기 위해 맨손으로 진흙을 걷어내다가 온전한 상태의 아이 두개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주변을 노출하니 다른 부위의 뼈도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발굴을 진행할수록 많은 동물 뼈와 유물이 뒤섞인 채 드러났다. 개 네 마리, 고양이 다섯 마리, 멧돼지, 소, 사슴, 고라니, 말, 쥐, 두더지, 토끼, 까마귀, 오리, 꿩, 매, 참새, 가오리, 상어, 고등어, 도미, 대구, 민어, 광어, 복어, 숭어, 붕어 등 온갖 동물의 뼈가 나왔다. 9m 깊이에서 출토된 두레박은 그대로 사용해도 좋을 정도로 상태가 좋았다. 우물 바닥은 약 11m 깊이에서 확인됐다.
학계에서는 이 우물 속 동물 뼈와 유물을 용왕께 바친 제물로 추정한다. 다만 왜 아이의 유골이 그 속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실족해 추락했을 가능성도 제기됐지만 제물로 쓰였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더 많다. 궁궐에서 무언가 절박한 사정이 생겨 육지와 바다에 사는 동물들을 잡아 제물로 바치고 그 위에 아이까지 희생시켜 함께 묻어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2008년에는 이 우물과 이웃한 ‘인용사지’로 알려진 절터의 10호 우물에서 ‘용왕’이란 글자가 쓰인 목간과 함께 다량의 토기, 동물뼈, 씨앗류가 출토됐다.
부안 죽막동 유적이 발굴된 지 이제 30년이다. 그 이후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제사 유적이 발굴되고 있지만 아직 이것을 통해 우리가 파악한 정보는 많지 않다. 일부를 제외하면 제사 유적에서 특별한 시설물 흔적이 확인되지 않고 유물도 소량 출토되기 때문일 것이다. 향후 더 정밀한 발굴과 연구를 통해 고대인의 삶을 ‘날것 그대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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