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를 배경으로 하는 조해진 작가의 ‘로기완을 만났다’에는 해괴한 부탁을 하는 한국인 의사가 등장한다. 그는 아내와 사별했다. 그런데 자연사가 아니었다. 그는 간암 말기였던 아내가 너무 고통스러워하자 약물과 술을 섞은 잔을 방에 두고 나왔다. 마시고 안 마시고를 아내가 선택할 수 있도록. 결국 아내는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이후로 그는 의사직을 그만두고 자신의 행동이 옳았는지 수없이 자문하며 5년을 살았다.
어느 날 그는 아내를 닮은 화자에게 부탁한다. “생각보다 괜찮았다고, 그리 고통스럽지 않았다고 한 번, 말해주겠소?” 약을 마시고 죽어가는 과정이 생각보다 고통스럽지 않았다고 말해 달라는 거다. 아무리 닮았기로서니 죽은 아내를 어찌 대신할 수 있으며, 죽어보지 않고 죽어가는 경험을 어찌 얘기할 수 있는가.
그러나 그의 여윈 눈에 고인 눈물을 보고 그 부탁을 외면하지 못한다. 잔을 놓고 나왔다가 다시 아내의 방문을 열었을 때 ‘그가 마주 봐야 했던 한 생애의 끝과 뼈가 끊어지는 듯한 상실감’을 그의 눈물에서 본 거다. 그녀는 자신을 죽어가는 그의 아내라고 상상하며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잠을 자듯이 편안했다고, 죽는다는 의식도 없이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으며 고통은 전혀 없었다고.” 그를 위로할 수 있다면 사실이 아닌들 어떠랴. 그러자 그는 눈매나 입매까지 아내를 닮은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한다. “고생했소. 평생 고생이 많았지.” 아내에게 하지 못했던 작별 인사를 이제야 하게 된 것이다.
화자는 전에는 그의 얘기를 듣고 “존엄성과 생명을 교환한 거라고”, 즉 살인을 한 거라고 비판했지만 지금은 그저 안아준다. 안락사의 윤리성이라는 거대담론과는 별개로 그의 눈물 앞에서 판단을 유보한 거다. 이것이 에마뉘엘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의 눈물’의 위력이다. 그리고 그 눈물에 굴복하는 게 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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