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주에서는 지난해 5월부터 사람의 시신을 한 줌의 흙으로 돌려보내는 ‘시신 퇴비화법’이 시행됐다. 나뭇조각과 지푸라기로 가득 찬 특수설계 장치에 안치된 시신은 한두 달 사이에 새 생명을 위한 퇴비가 된다. 이 법은 카트리나 스페이드라는 젊은 여성 건축 디자이너의 뚝심으로 빛을 보게 됐다.
의사 집안에서 자라 어렸을 때부터 죽음을 삶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인 스페이드는 매장과 화장이라는 기존 장례문화가 못마땅했다. 매장하기 위해 가용할 땅이 줄고, 시신을 화장하면서 엄청난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것 모두 지속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의 마지막을 자연친화적으로 마감할 수 없을까 고민하다 ‘시신 퇴비화 프로젝트’라는 아이디어를 냈고, 공감하는 사람들의 응원에 힘입어 시신 퇴비화를 인정하는 장례법 개정에 이르렀다. 사람을 퇴비로 만드는 데 대한 찬반 의견은 있을 수 있지만 스페이드는 자신의 가치관에 맞는 장례 방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변화를 이끌어냈다.
전 세계에서 스페이드와 같은 체인지메이커의 활동이 주목받고 있다. 이들은 받아들이기 불편한 현실에 의문을 품고, 해결책을 모색하고, 실행하면서 작은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체인지메이커라는 개념을 최초로 정립한 국제 비영리조직 아쇼카재단에 따르면 1981년부터 세계 곳곳에서 발굴한 4000여 명의 체인지메이커가 교육, 의료, 장애, 환경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도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김종기 청소년폭력예방재단 이사장 등 아쇼카재단이 선정한 체인지메이커가 15명이나 된다.
아쇼카재단이 아니더라도 국내에는 ‘체인지메이커를 위한 체인지메이커’로 활동하는 단체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고, 고등학교와 대학에서도 관련 교육이나 활동이 활발하다.
체인지메이커가 기존에 당연시돼 온 관행과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를 바꿔 보려는 사람들이다 보니 한편으로는 트러블메이커라는 오해를 사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대책 없이 불평만 하거나 무책임한 비난에 머물지 않는다. 주어진 여건에 순응하지 않고 문제 해결이라는 목표를 향해 스스로 바꿔 나가고 혁신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21세기형 인재다.
예전에는 물불 안 가리고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하드워커(hard worker)나 안 되는 일도 되게 만드는 수완 좋고 재주 좋은 레인메이커(rainmaker)가 인재였다면,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문제의 복잡성이나 불확실성이 높아진 포스트 팬데믹 시대에는 깔린 판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질이야말로 인재의 핵심 재능이 아닐까 싶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억’ 소리에 심란하다. 7년 일한 30대 초반의 퇴직금이 50억 원이라는 뉴스에 허탈하고, 1억 원 넣고 1200억 원 가져가는 일확천금 투자에 의욕을 잃었다. 하지만 눈을 돌려보면 지금 이 순간에도 선한 영향력으로 긍정의 파문을 일으키는 체인지메이커가 있어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하다는 위로를 받는다. 함께하고 싶고, 응원하고 싶은 제2, 제3의 스페이드가 나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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