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초에 빗줄기가 좀 거세게 쏟아지나 싶더니 거짓말처럼 계절이 바뀌었다. 혹독하던 더위가 물러난 자리에 가을이 꽉 들어찼다. 매년 이 무렵이면 평소 잊고 지내던 자연의 질서를 새삼 느낀다. 거대한 힘 앞에 절로 겸손해지기도 한다. 지금이야말로 영화 ‘두 교황’(페르난두 메이렐리스 감독)을 보기 알맞은 때다.
실화에 바탕을 둔 이 영화 주인공은 제목처럼 ‘두 교황’이다. 2005년부터 로마가톨릭 수장을 지내다 8년 만에 사임한 ‘베네딕토 16세’(앤서니 홉킨스 분), 그 뒤를 이은 ‘프란치스코’(조너선 프라이스 분) 교황이 함께 등장한다. 이들이 걷고, 먹고, 때로는 음악을 들으며 나누는 대화가 영화 내용의 거의 전부다. 관객은 그 이야기를 따라가며 베네딕토 16세가 교황청을 떠난 ‘진짜’ 배경에 대해 짐작하게 된다.
2013년 발표된 공식 이유는 “고령과 건강 문제”다.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내용이다. 베네딕토 16세 이전의 교황들은 나이가 들어도, 병석에 누워서도 결코 직분을 놓지 않았다. 로마가톨릭은 1400년대부터 약 600년에 걸쳐 전임 교황이 눈을 감아야 후임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왔다. “그런데 베네딕토 16세만 왜?” 영화는 바로 이 의문에서 출발한다. 메이렐리스 감독은 실제 사건의 뼈대 위에 그럴듯한 상상을 더함으로써 대중이 납득할 만한 가설 하나를 창조해낸다.
작품에 설득력을 더하는 건 두 배우, 홉킨스와 프라이스의 존재다. 특히 베네딕토 16세가 바티칸 시스티나 대성당의 작은 방에서 ‘미래의 교황’에게 고해성사를 청하는 대목은 단연 영화의 백미로 꼽을 만하다. 이 장면에서 홉킨스는 교황의 평상복인 하얀색 수단(발목까지 내려오는 성직자의 옷) 차림이다. 노화로 굽은 어깨, 나약해진 눈빛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추기경 앞에 서서 ‘신의 용서’를 구하는 그의 모습은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의 대표작 ‘걷는 남자(Walking Man)’를 떠오르게 한다.
자코메티는 철사처럼 가느다란 몸을 가진 사람 조각을 다수 남겼다. 그 작품들에서 뚜렷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신체 부위는 머리가 아니라 오히려 발이다. 표정 없는 작은 얼굴, 길쭉하고 허약한 몸뚱이 아래 인간을 흔들림 없이 지탱해주는 단단한 발이 놓여 있다. 프랑스 시인 장 주네는 저서 ‘자코메티의 아틀리에’에서 “자코메티는 거짓된 외양이 벗겨진 후 인간에게 남는 것을 찾아내기 위해 자기의 시선을 방해하는 것을 다 치워 버릴 줄 알았다”고 했다. 어쩌면 인간이 진실로 겸허해질 때 가장 ‘나아종’ 지닐 것은 대지를 마음껏 딛게 해주는 발일지 모른다.
영화 ‘두 교황’에서 베네딕토 16세는 사임에 대한 결심을 굳힌 뒤 시스티나 대성당에 모인 군중 속으로 똑바로 걸어 들어간다. 재임 내내 지팡이에 의지한 채 위태롭게 움직이던 그의 발걸음이 그 순간 마치 춤이라도 추는 듯 가벼워지는 게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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