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 생활의 부침을 겪긴 했어도 백거이가 가난에 시달린 흔적은 없다. ‘속세로 나온 듯, 초야에 묻힌 듯, 바쁘지도 또 한가하지도 않은’ 중용(中庸)의 삶을 표방했고, 연말이면 양식이 남아도는 게 부끄럽다고 할 정도의 여유까지 부렸으니 말이다. 안빈낙도의 화신처럼 전해지는 전국시대 검루와 비교한 발상 자체가 외려 생경하다. 정쟁에 말려 남쪽 강주(江州)로 좌천된 후 의기소침해진 아내를 애써 위로하려 농담처럼 건넨 말인지도 모르겠다. ‘어두컴컴하고 처량한’ 집안 풍경을 그렸지만 조바심이나 불평의 낌새는 없다. 가난에도 등급이 있다는 과장된 변명은 스스로를 다독이는 위안의 목소리 같기도 하다.
개성만큼이나 아내를 대하는 시인들의 태도도 판이했다. 이백은 ‘삼백육십일, 날마다 진창 취해 있으니. 이백의 마누라라 한들 태상(太常)의 아내와 무엇이 다르랴’라 하여 주호(酒豪)다운 패기를 과시했다. 멀리 떨어진 아내에게 두보는 ‘그리움에 시름겨운 견우와 직녀라도, 가을이면 그래도 은하수 건너 만나는데’라 하여 애틋함을 감추지 않았다. 원진(元¤)은 스물일곱에 요절한 아내를 추모하면서 ‘바삐 꽃 무더기를 지나치며 거들떠보지도 않는 건, 절반은 내 수양 탓, 절반은 그대 때문’이라 하여 순애보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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