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지에 빠졌던 검은 염소를 업고 노파가 방죽을 걸어가고 있다 등이 흠뻑 젖어들고 있다 가끔 고개를 돌려 염소와 눈을 맞추며 자장가까지 흥얼거렸다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희고 눈부신 그의 숨결을 듣는다는 것 그의 감춰진 울음이 몸에 스며든다는 것 서로를 찌르지 않고 받아준다는 것 쿵쿵거리는 그의 심장에 등줄기가 청진기처럼 닿는다는 것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약국의 흐릿한 창문을 닦듯 서로의 눈동자 속에 낀 슬픔을 닦아주는 일 흩어진 영혼을 자루에 담아주는 일 (하략) ―박서영(1968∼2018)
무릇 세상에는 안 해보면 모르는 일이 아주 많다. 업는 것도, 업히는 것도 그렇다. 업혀보지 않았다면, 혹은 업어보지 않았다면 이 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서로 업어주고 업혀주는 것이 얼마나 따뜻한 행동인지, 얼마나 위안이 되는 나눔인지 말이다.
얼핏 김종삼의 ‘묵화’를 연상하게 하는 이 시에는 노파와 검은 염소가 등장한다.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과 동물이다. 노파는 가치를 다한 인간 같고 염소는 귀엽지도 비싸지도 않다. 그런데 세상 보잘것없는 사람과 동물이 만났을 때, 그들은 왜 기적처럼 보일까. 노파는 염소를 업어주고, 눈을 맞춰주었다. 그녀에게 자식 같은 염소다. 염소는 노인에게 업히고, 팔딱대는 심장을 기댔다. 그들은 서로를 기쁘게 의지하고 있다.
찡하게 감동적이지만 이 시는 좀 멀고 환상처럼 보인다. 우리에게는 업고 업히는 것이 버겁다. 혼자여도 힘드니까 남까지 업을 힘이 없다. 그런데 혼자 걸으려는 마음에 이 시는 지나치게 아름답다. 그 탓에 괜찮지 않을까 생각도 한다. 의지하는 것과 의지 받는 것은 때로 삶의 위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등에 다른 이의 가슴이 얹힌다면 무겁기보다 따뜻하지 않을까. 게다가 가을은, 업고 업히기에 참 좋은 계절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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