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의 한 대형 쇼핑몰 입구.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로 빨간색 완장을 찬 사람들이 오가며 말했다. 방역지침을 잘 준수하는지 감시하는 ‘사회적 거리 두기 집행관(Safe distancing enforcement officer)’이다. 이들은 불법주차 단속하듯 카메라로 방역 위반 현장을 적발하고 벌금도 부과한다. 의심스러운 건물을 영장 없이 수색도 한다. 현지 사업가인 A 씨(40대)가 전한 요즘 싱가포르 풍경이다. A 씨는 “경찰보다 (집행관을) 더 자주 마주친다. 빨간 완장을 볼 때마다 학창 시절 선도부가 떠올라 깜짝 놀란다”고 말했다.
기자에게 이 같은 상황은 아이러니하게 다가온다. 싱가포르는 아시아 국가 중 가장 선도적으로 ‘위드(with) 코로나’ 전환을 단행했다. 최근 확진자가 다시 늘어 방역을 강화했지만, 이 정도로 강도 높은 단속까진 상상하지 못했다. 싱가포르의 일상은 우리가 꿈꾸는 위드 코로나의 모습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위드 코로나라고 하면 국내에선 많은 사람이 손흥민 선수가 출전하는 영국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을 떠올릴 것이다. 수만 관중이 마스크를 벗고 함성을 지르고 골이 터졌을 때 서로를 부둥켜안는 현장이다.
하지만 단계적 일상 회복(위드 코로나)이 시작될 11월 우리도 과연 유럽 사람들처럼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올해를 넘어 내년 상반기까지도 유럽과 같을 순 없다는 게 국내 많은 전문가와 방역당국의 생각이다. 적어도 먹는 치료제가 상비약처럼 공급되고, 중환자 비율과 치명률이 독감 수준으로 떨어질 때까진 마스크 착용, 거리 두기 등 기본 방역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국민과 정부가 생각하는 위드 코로나의 간극이 상당한 셈이다.
이 같은 동상이몽(同床異夢)을 심화시킨 건 정부 탓이 크다. 방역과 일상이 조화되는 ‘위드 코로나 K모델’을 구축하겠다는 애매모호한 기조가 대표적이다. 방역과 일상은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상충되는 개념이다. 싱가포르처럼 방역에 방점을 찍으면 일상 회복 속도는 더딜 것이다. 반대로 유럽 국가들처럼 일상 회복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면 사실상 방역을 포기해야 한다.
일부에선 애매한 기조의 배경에 내년 3월 대선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내놓고 있다. 대선을 앞두고 확진자가 폭증하면 야당에 공격의 빌미를 주게 돼 K방역 성과가 송두리째 퇴색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위드 코로나를 통해 일부 방역 완화는 진행하겠지만, 정부가 전체 확진자 수 관리의 끈을 놓지 못할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전대미문의 고통을 감내해온 국민들은 11월 위드 코로나에 거는 기대가 크다. 단계적이나마 일상 회복의 희망을 현실로 만들어 가려면 ‘K모델’과 같은 정치적 수사보다는 솔직하고 구체적인 모델 제시가 우선 돼야 한다. 무늬만 위드 코로나로는 국민을 위로할 수도, 설득할 수도 없을 것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