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정책으로는 반도체를 생산할 수도, 트럭 기사를 확보할 수도, 바람을 세게 만들 수도 없다.”
영국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의 앤드루 베일리 총재가 최근 연설에서 글로벌 공급망 쇼크에 대해 내놓은 말이다. 공급망 쇼크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지만 경제에서 국가수반에 버금가는 권력을 쥐고 있다는 중앙은행 총재조차 마땅한 해법이 없다며 고민을 토로한 것이다. 물가가 오르면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려 돈줄을 죄는 게 원칙이지만, 공급망 쇼크로 촉발된 인플레이션 우려는 경제학 법칙을 수학 공식처럼 적용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었다.
공급망 쇼크가 미치는 경제적 충격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 한국에서 공급망 쇼크가 가장 컸던 때는 1970년대의 2차례 오일쇼크다. 중동 정세 불안으로 빚어진 산유국들의 유가 인상과 석유 감산은 중화학공업을 육성해 글로벌 경제 체제 문턱에 발을 디디려던 한국 경제를 강타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헌법 개헌 이후 발동한 9차례 긴급조치 중 정치적 사안이 아니었던 유일한 조치가 1차 오일쇼크 대책이었던 1974년 긴급조치 3호였다. 2차 오일쇼크 직후인 1980년 경제성장률(―1.7%)은 외환위기 때인 1998년(―5.5%)과 함께 정부 수립 이후 단 두 차례 기록했던 마이너스 성장이었다.
최근의 공급망 쇼크는 50년 전 오일쇼크보다 훨씬 복잡다단하다. 당시엔 석유 수급 문제만 풀면 됐지만, 오늘날엔 코로나19 이후 불거진 수요-공급 미스매치에 글로벌 물류망 혼란, 친환경 비용에 따른 그린플레이션, ‘세계의 공장’ 중국의 전력난까지 다층적 변수들이 뒤엉켰다. 외교적 결단, 경제적 조치 몇 개로 풀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24년 전 외환위기는 기업들의 과잉 중복 투자와 외화 수급난을 해결하면 풀리는 문제였다. 고통스러웠어도 해답은 단순했다. 지금은 얽히고설킨 변수 중 우리 손으로 해결 가능한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 집값 폭등, 취업난, 실물경기 악화로 우리 스스로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 돈을 푸는 게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건 한국의 역대 최대 규모 추가경정예산(35조 원)과 연 0.75% 기준금리가 보여주고 있다.
내년에 들어서는 차기 정부는 외환위기 이후 최악의 경제 상황에서 시작할지도 모른다는 전망이 나온다. 그런데도 내년 대선을 앞두고 경제를 걱정하면서 공급망 쇼크를 어떻게 해결할지 관심을 갖고 아이디어를 내놓는 대선 주자들은 찾아볼 수 없다.
공급망 이슈는 대통령이 국가 명운을 걸고 백년대계의 큰 그림으로 풀 정부의 첫 번째 과제다. 미중 갈등이 본격 패권 경쟁으로 치닫는 현실에서는 냉전 붕괴 이후 30여 년간 한국 대외 경제정책의 골격이 된 ‘경제 따로 안보 따로’ 전략이 작동하기 어렵다. ‘싸게 만드는 데에서 갖다 쓰면 된다’는 경제 논리가 지배했던 글로벌 공급 사슬은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시대의 생존 전략으로서 공급망 안보 대책을 준비하지 못하면 한국 경제의 미래는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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