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화가가 될 수 없다.” 이는 조선왕조 시대의 불문율이었다. 아니, 화가는커녕 여자는 초상화의 주인공도 될 수 없었다. 숙종 시대 일화처럼 왕비조차 초상화 모델이 될 수 없었다. 철저히 남존여비의 사회였다. 시대는 변했다. 20세기로 들어서자 미술환경은 변하기 시작했다. 왕조시대의 ‘서화’는 새로운 용어인 ‘미술’의 시대로 바뀌었다. 수묵 문인화의 세계에서 서구적 어법의 새로운 유화 매체가 들어왔고, 화가의 층도 두터워지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다. ‘여류화가’의 탄생, 새로운 시대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나혜석과 백남순, 그리고 박래현과 천경자. 이들은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전자는 유화가, 후자는 채색화가로 화단에서 입지를 다졌다.
삼중 통역자. 우향(雨鄕) 박래현(1920∼1976)을 일컫는 표현이다. 우향의 남편은 운보(雲甫) 김기창이다. 그는 청각 장애로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런 남자와 결혼식을 올린 우향. 운보의 궁핍과 무학 그리고 장애는 우향의 사랑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러면서 부부는 묵언(默言) 수도승처럼 남다른 역경을 통과해야 했다. 삼중 통역자 박래현. 미국 여행 당시 현지에서 그대로 입증됐다. 영어를 한국어로, 또 한국어를 구어(口語)로 통역해야 했다. 운보를 위한 ‘자원 봉사자’ 같은 인생. 우향의 인생은 찬란했다. 일본풍 채색화와 보수적 ‘동양화’, 현모양처, 청각 장애의 남편. 이는 우향의 극복 대상이면서, 대가풍 작가로 단련시키는 자극제이기도 했다.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은 덕수궁관에서 박래현 탄생 100주년 기념 회고전 ‘박래현, 삼중통역자’를 개최했다. 그동안 ‘김기창의 아내’로 각인된 우향의 이미지를 벗어내고자 이번 전시는 의도적으로 운보 영역을 지웠다. 그러고 보니, ‘화가 박래현’의 예술세계는 참으로 위대하게 부상되었다. 모두들 감동했고, 한국 여성미술사에서 찬란한 정점을 찍게 했다. 회고전이 안겨준 커다란 선물이었다. 사실 나는 1985년 우향 10주기 특별전을 기획한 경험이 있다. 호암갤러리(삼성미술관 리움 전신)에서의 대규모 전시는 우향 예술의 재조명에 기여했다. 당시 운보의 적극적 도움으로 전시는 그 나름대로 풍요롭게 진행할 수 있었다. 처음에 나는 운보 화백과 필담으로 출발했지만 나중에는 나의 입 모양만으로도 의사소통이 되었다. 이제 세월은 흘러 한국 미술계에서 ‘여성 미술’ 혹은 ‘페미니즘’이란 용어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우향의 존재감은 더불어 높아졌다.
우향의 초기작은 일본화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하지만 화가 자신의 고백처럼 6·25전쟁을 치르면서, 농촌에서 피란살이를 겪으면서 화풍은 바뀌기 시작했다. 사실적 표현에서 입체적 기법으로, 그리고 1960년대 들어서는 순수 추상회화로 중심 이동했다. 변화 과정에서 1956년은 빛나는 해였다. ‘노점’과 ‘이른 아침’으로 공모전에서 연달아 대통령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다. 화면 가득 젊은 여성들을 부각시키면서 생활 현장을 표현한 작품은 신선했다. 대담한 구도와 유려한 필치 그리고 온화한 색깔, 채색화의 새로운 경지를 예고하는 작품이었다. 바로 전통회화 현대화 작업의 범본이었다.
1960년대에 이르러 우향은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안목을 키웠다. 그 절정은 뉴욕에서의 판화수업 등 현대미술과의 만남이었다. 순수 추상은 ‘우향 화풍’으로 독자성을 이룩했다. 밝은 채색으로 펼치는 향연, 화면은 일정한 리듬을 가지면서, 짜임새 있는 구성과 함께 운동감을 보였다. 이른바 맷방석 혹은 엽전꾸러미라고 불리는 화풍의 전개였다. 사실 맷방석 운운은 저급한 표현이다. 거룩한 ‘생명의 띠’를 두고 그러한 표현은 작품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화가는 1974년 자신의 작품 ‘기원’ 시리즈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기원’은 인간의 시작, 세상의 시작, 그리하여 모든 혼돈의 시작을 나타낸 것이다. 태초의 남녀, 뱀의 유혹, 금단의 과일, 그리고 모든 것의 싹, 달과 태양, 바람, 나무, 나이테 등 무질서하게 어울려 있던 태초의 의식 없었던 형태들을 표현했다. 모든 태초의 씨앗들과 오늘과의 연관성이란 무엇일까. 나와 인간, 세상에 깊이 몰두하다 보면 결국 태초의 기원적인 것에 눈을 돌리게 된다.”
띠는 나이테 형태이지만 태초의 씨앗, 즉 기원을 상징한다. 그래서 1960년대의 띠 연작은 생명성을 느끼게 한다. 구체적으로는 ‘수태(受胎)’(1966년)라는 제목의 작품도 있듯이 자궁 이미지에 생명 이미지를 중첩시키기도 했다. 물론 이와 같은 화풍은 다양한 변주를 보여 보다 자유분방한 세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영광’(1967년)이란 작품도 마찬가지다. 종이 재료 위에 아교 번짐 기법을 활용했고, 화면을 적절하게 분할하여 생명성의 이미지를 표현했다. 이 작품은 현재 정읍시립미술관에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특별전인 ‘한국 미술의 아름다운 순간들’(12월 12일까지)에 출품 중이다. 근·현대기 대표적 작품을 엄선한 국립현대미술관 지역 협력망 사업의 하나이기도 하다.
박래현. 그는 삼중의 고통 속에서도 자신만의 독자적 예술세계를 이룩한 20세기의 대표적 여성 화가였다. 생명성을 도해한 그의 작품에서 ‘영광’을 얻을 수 있는 희망을 가져본다. 고통의 시대에 박래현 작품은 하나의 모음(母音)으로 울림을 안겨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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