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싶은 음식 실컷 먹고, 술·담배 실컷 하고, 하고 싶은 일 실컷 하며 짧고 굵게 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남들이 뭐라고 해도 한 번뿐인 인생,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불꽃처럼 짧아도 강렬하게 살겠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런 분들은 힘든 항암치료를 하자고 해도 잘 하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가늘고 길게, 구질구질하게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항암치료 거부가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어차피 인생에는 정답이 없고 선택만 있을 뿐이다.
문제는 생각이 바뀔 때다. 의사로서 내 짧은 경험으로는 이런 분들의 상당수가 생의 마지막이 돼 암으로 인한 고통이 찾아오면 태도가 바뀐다. 이렇게 억울하게 죽을 수 없다며 다른 방법을 찾아내라고 한다. 인터넷에 보면 표적항암제나 면역항암제처럼 부작용 없고 좋은 약이 많이 나왔다던데 본인에게는 왜 그걸 쓸 수 없냐며 원망을 쏟아낸다. 짧고 굵게 살기를 바라지 않았냐고 물어보면,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라고 말한다. 이쯤 되면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과연 추구하던 것이 짧고 굵은 것인지, 아니면 그저 삶에 고통이 없기만을 바라왔던 것인지.
누구나 운동은 하기 싫고, 술·담배는 하고 싶고, 기름진 것은 실컷 먹고 싶다. 고통은 피하고 싶고 쾌락은 얻고 싶으며 노력 없이 열매만 먹고 싶다. 손쉽게 큰돈을 벌고 싶다. 본디 고통은 피하고 싶고 쾌락은 추구하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 아니던가. 하지만 이런 태도가 습관으로 굳어지면 짧고 굵게 산다는 게 고통을 피하는 합리화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 아닌가 싶다.
반면 가늘고 길게 사는 분들이 계신다. 이들은 스스로 가늘고 길게 산다고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다. 남들에겐 재미없고 답답하게 사는 것 같아 보여도 본인은 그저 하루하루 살아낼 뿐이라고 말한다. 살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뿐, 처음부터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하기 싫은 일도,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도 본인 삶의 일부로 기꺼이 받아들인다.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환자들 중 삶 앞에서 겸손한 분들은 대부분 생의 마지막 순간에 삶을 자연스럽게 놓아주었다. 이런 분들은 의료진으로선 아쉬움이 남으나 정작 본인은 괜찮다고 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잘 살았다고도 했다. 때가 되었으니 순리대로 할 것이라 말했다. 힘들어도 하는 데까지 해봤고, 할 만큼 했으니 이제 안 되면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또한 열심히 해도 되는 일과 되지 않는 일을 구분해내는 안목과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가늘고 길어지나 보다. 짧고 굵게 사는 것과 길고 가늘게 사는 것. 당신은 어느 쪽인가.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