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의 초대를 받은 기훈. 그곳에 죽은 줄 알았던 일남이 있다. 놀라 다가가는 기훈. 얼굴 C.U.(Close Up) 괘종시계의 분침이 12시를 향한다. (※ 이 인터뷰는 오징어게임 기훈-일남의 마지막 만남 장면을 차용했습니다.)
기훈=당신… 살아… 있었습니까.
일남=물 좀… 주겠나.
기훈=(물을 건네주며) 당신은… 누구입니까.
S#1. 오영수가 되던 날
일남=나? 오…세강. 그동안은 오영수로 불렸지. 지금은 오일남으로 더 알지만….
기훈=오…세…강?
일남=그게 내 본명이야. 영수는 예명이고. 젊을 적 막 연극을 시작했을 때 돌아가신 오세강 선생이 형, 아우 하자며 지어줬지. 그 시절에는 연극 하는 게 그리 환영받는 일이 아니라서 본명을 안 쓰는 경우가 많았거든. 배우로서의 인생이 시작된 날인 셈이지.
기훈=배우는 어떻게 하게 된 겁니까. 연극영화과를 나왔던데….
일남=대학에서 연극영화과를 다녔다는 건 사실이 아니야. 어디서 그런 말이 나왔는지 정말 모르겠어. 연기를 시작한 건 제대하고 1967년 극단 광장에 들어가면서였으니까. 20대 초반이었을 때지.
기훈=그 전에는 연기를 안 했습니까.
일남=그때는 경험이 없어도 극단에 들어갈 수 있었어. 물론 쉽게 무대에 오를 수는 없었지만…. 몇 년을 청소하고, 잡일 하고 그랬지. 기훈=50여 년을 주로 연극만 고집한 이유가 있습니까.
일남=순수성이라고 할까? 우리 세대 때는 그런 게 있었지. TV나 영화 이런 데를 기웃거리면 순수성을 잃는다고 보는…. 대배우인 고 장민호 선생조차 칠성사이다 광고를 찍었더니 스승인 이해랑 선생이 거기까지만 하고 더는 하지 말라고 혼을 내던 시절이니까. 그렇다고 내가 TV나 영화를 전혀 안 한 건 아니야. 40, 50대 때는 ‘나는 왜 연극만 해야 하지?’ 하는 생각을 했으니까. 경제적으로도 좀 어려웠고…. 그래서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교육방송에서 성우도 몇 년 했어. 기훈=절충할 수도 있지 않았습니까.
일남=고민을 하긴 했는데 마침 그때 국립극단에 들어가게 됐거든. 공무원 신분이 되니까 경제적으로 좀 안정이 됐고 다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지, 허허허. 지금 생각하면 잘한 선택 같아. 사실 그동안도 TV나 영화 제의는 꽤 있었어. 그런데 배역에 대한 생각이 서로 좀 안 맞아서 못 한 게 많지. 좀 너무하다 싶은 것도 있었고….
기훈=너무하다니요.
일남=그래도 내가 연극판에서 50여 년을 있었는데 단역 한두 마디 하는 걸 하라고 하니… 자존심이 좀 상했던 것 같아. 그런데 또 상대방은 나를 ‘알려지지도 않았으면서…’ 이렇게 보는 것 같고… 그래서 못 한 게 많아. 서로 좀 맞았으면 좀 더 빨리 했을 거야. 하지만 지금까지 거의 한길을 걸었으니 이제는 이것저것 그동안 안 해본 걸 좀 해보고 싶어.
S#2. 영수에서 일남으로
기훈=그래서 이 게임에 참여한 겁니까.
일남=꼭 그런 건 아닌데…. 전에 황동혁 감독이 영화 ‘남한산성’을 하자고 했는데 일이 있어서 거절을 했어. 황 감독이 기분이 안 좋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다 잊고 오징어게임을 하자며 연락하더라고. 대본을 봤는데 말도 살아 있고 참 좋았지. 그래서 나도 내 연기를 보여주고 싶어서 마침 그때 하고 있던 연극(‘노부인의 방문’)을 보러 올 수 있냐고 했어. 정말 오더라고? 그렇게 인연이 된 거지.
기훈=‘무궁화 …’ 게임에서 혼자만 즐거워하는 건 감독이 요청한 겁니까.
일남=그 장면에서 웃으면서 게임 하라는 말은 없었어. 황 감독이 ‘옆에서 사람들이 죽어도 선생님은 좀 다르게 할 수 있다’고는 했지. 일남 역에 대해서도 특별한 주문은 없었어. 그냥 ‘어떤 인물인지 아시죠?’ 그러더라고? 문제 되는 게 있으면 현장에서 말하겠다면서. 그런데 별로 말이 없었던 걸 보면 내 연기가 감독 생각이랑 별 차이가 없었던 것 같아.
기훈=‘무궁화 …’ 게임은 해봤습니까.
일남=우리 어릴 땐 없던 게임이라…. 구슬치기, 딱지치기는 잘했지. 깐부도 있었고. 내게도 동네 딱지 우리가 다 따먹자고 맺었던 깐부가 있었어. 누구였을까…. (과거를 회상하며 눈을 감는 일남. 멀리서 아이들 노랫소리가 들린다.) 이제는 누군지 기억도 안 나지만….
기훈=일남 역을 위해 준비한 건 없었습니까.
일남=따로 준비할 게 별로 없는 게… 지금 내가 약간 치매기가 있어서 돌아다니면 그냥 일남이랑 비슷할걸? 허허허. 나이도 그렇고….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변신을 잘하냐고 하는데 별로 변신한 게 없어. 맨 꼭대기 침대 위에서 ‘그만해, 이러다가 다 죽어’라고 절규하는 장면이 좀 힘들기는 했지. 고소공포증이 있거든. 그래도 한번 해보려고 올라갔는데 아이쿠… 안 되겠더라고. 그래서 몸에 안전장치를 매고 했지.
S#3. 깐부는 치킨이 아닙니다.
기훈=치킨 광고는 왜 거절한 겁니까. 배우로서의 자리를 지키고 싶다고?
일남=(손사래를 치며) 아니야, 아니야. 완곡히 고사를 하기는 했지만 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 내가 한 말이 아니야. 억울해…. 그 말 때문에 마치 내가 상업적인 것은 전혀 안 하고, 마치 순수 예술만 추구하는 사람처럼 보인 것 같은데…. 전에도 이동통신 광고도 찍고 TV나 영화도 다 했는데 무슨…. 이순재, 신구 선배가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도 들고…. 그분들도 다 광고 찍고 하는데 내가 뭐라고. 그렇게 써서 내가 아주 이상해졌어. 기훈=그럼 왜 거절한 겁니까.
일남=이유가… 구슬치기할 때 자네가 나를 속여서 거의 다 땄잖아. 그걸 알면서도 나는 자네에게 마지막 구슬을 주고 죽음을 선택했지. ‘우린 깐부잖아’ 하며…. 깐부끼리는 내 것, 네 것이 없는 거니까. 서로 간의 신뢰와 배신, 인간성 상실과 애정 이런 인간관계를 모두 녹여 함축한 말이 ‘깐부’야. 작품의 핵심 주제이기도 하고. 난 사람들에게 그 의미를 전달하고 싶어서 혼신의 힘을 다해 깐부 연기를 했어. 그런데 내가 닭다리를 들고 ‘○○치킨 맛있어요’라고 하면 사람들이 깐부에서 뭘 연상하겠어? 그건 작품이 지향하고자 하는 뜻도 훼손시키는 것이고…. 그래서 안 한다고 한 거지. 내가 광고니 뭐니 아무것도 안 하고 오직 배우로서의 길만 걷기 위해서 안 하겠다는 게 아니거든.
기훈=당신은… 돈이 아쉽지 않습니까. 쉽게 벌어온 삶도 아닐 텐데.
일남=자네도 벌어봤으니 알 테지. 그게 쉽던가? 내가 왜 돈을 생각하지 않겠나. 집사람이 그러더군. ‘좀 너무하는 거 아니냐’고.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내 뜻을 이해해줘 다행이지. 요 근래에는 광고가 많이 들어오긴 해. 그래도 할 만한 걸 해야지 들어온다고 다 할 수는 없잖아? 좀 가벼운 광고가 많았거든. 그래서 ‘콘티를 좀 보고 얘기하자’ 이런 식으로 완곡하게 고사한 것도 여러 편이 있어. 지금 얘기가 오가는 것도 있지만…. 내가 광고는 다 안 한다고 한 게 아니야. 단지 내 손으로 ‘깐부’의 의미를 훼손시킬 수는 없다는 거지.
기훈=꼭 해보고 싶은 역이 있습니까.
일남=파우스트 박사 역. 30대 중반에 한 번 하고 지금껏 못 했는데, 그때 내가 죽을 쒔거든. 젊을 땐데도 지쳐서 공연 중에 잠깐 의식을 잃었지. 한 30초 정도 멈췄을 거야. 사실 파우스트라는 인물을 30대 중반에 연기한다는 게 무리한 거지. 인생에 대해 뭘 안다고…. 이 나이가 되니까 좀 알 것 같은데 아직 기회가 없어. 죽기 전에 꼭 한번 해보고 싶은 바람이지. 그리고 지금껏 받은 걸 사람들에게 돌려주고도 싶고…. 나는 아직도 사람을 믿으니까.
기훈=사람을… 믿는다?
일남=내가 지금껏 존재할 수 있는 건 크든 작든 사람들에게 뭐든 받았기 때문이겠지. 나를 믿으니까 줬을 테고…. 지금 이렇게 인터뷰 자리가 생긴 것도 다 내가 받는 거 아닌가? 이제는 나도 그동안 받은 것만큼 뭔가를 줘야겠지. (저무는 노을을 바라보는 일남.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얼굴 C.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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