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감정만큼 변덕스러운 것이 있을까? 가까운 사람의 작은 잘못에 화를 내며 등을 돌리지만 낯선 사람의 불행에 연민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 인간이다. 이성과 합리성의 신봉자들은 감정의 이런 변덕을 늘 눈엣가시로 여겼다. 그래서 감정을 마음 밭에서 ‘말려 죽여야 할 잡초’나 ‘생각하는 기계의 소음’ 정도로 깎아내린다. 하지만 무시한다고 해서 있는 것이 없어지진 않는다. 호메로스는 이를 잘 알았다. 2800년 전의 시인은 파도처럼 출렁이는 감정의 변화에서 인간의 진짜 모습을 찾았다. 그가 남긴 ‘일리아스’는 서양 최초의 전쟁 서사시이자 분노의 감정을 추적한 파토스의 서사시다.》
전쟁은 1100여 척의 그리스 연합군이 에게해를 건너 트로이아 성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압도적 군세에도 불구하고 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전쟁이 10년을 끌면서 훌륭한 함선들의 선재는 썩고 번쩍이던 무구에 녹이 슬었다. 승리의 영광을 꿈꾸던 패기의 전사들은 인근 도시를 파괴하고 전리품을 탈취하는 약탈자들이 되었다. 분배의 공정성이 시험대에 올랐고 보이지 않는 불만도 쌓여 갔다.
분노 추적한 서사시 ‘일리아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일이 터졌다. 그리스의 최고 영웅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전리품 다툼 탓이었다. 납치한 여인들을 전리품이자 명예의 선물로 나눠 갖는 것은 그리스 장수들 사이에서 의례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하필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전리품에 문제가 생겼다. 그가 차지한 여인이 아폴론 신을 섬기는 사제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딸을 잃은 사제의 기도에 역병의 신이 화살을 쏘아 군영을 화장터로 만들자 궁지에 몰린 아가멤논은 사제의 딸을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 일을 참고 견딜 만큼 관대한 인물이 아니었다. 탐욕스러운 왕은 아킬레우스의 여인을 빼앗는다. 전군(全軍) 회의에서 그가 내뱉은 가시 돋친 발언들이 아가멤논의 열등의식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미 남의 몫이 된 여인을 빼앗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닌가. 무시당한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폭발한다. ‘일리아스’는 그렇게 시작하는 전쟁 속 내분의 이야기이다.
부당하게 무시될 때의 감정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감정들을 분석하면서 분노를 첫손에 꼽았다. 그에 따르면 분노는 자기 자신이나 자기에게 속한 것이 부당하게 무시될 때 생기는 감정이다. 분노하는 사람은 고통 속에서 복수를 욕망한다. 이 대목을 읽은 그리스인은 누구나 아킬레우스를 떠올렸을 것이다. 분노한 영웅이 전장에서 발을 빼자 승세가 트로이아 쪽으로 기울고 그리스 군대는 위기에 내몰린다. 아가멤논의 화해 시도도 무산된다. 적군의 공격에 방어벽이 무너지고 함선들이 불길에 휩싸여도 아킬레우스는 방관한다. 그는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면서 쾌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하지만 화풀이에는 가혹한 대가가 따랐다. 무수한 동료 전사들이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아킬레우스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대신해 전장에 뛰어든 절친 파트로클로스가 적장 헥토르에게 살해당하자 눈이 돌 수밖에. 친구를 사지에 몰아넣은 자신에 대한 원망과 친구를 죽인 헥토르에 대한 복수심이 뒤엉키면서 분노의 불길도 방향을 바꾸었다. 다시 전장에 뛰어든 아킬레우스의 인간 사냥이 시작되고 헥토르가 살해당한다. 하지만 광분의 최후 희생자는 헥토르가 아니라 아킬레우스 자신이었다. 헥토르를 죽이면 자신도 죽는다는 것이 그의 정해진 운명이었으니까.
분노를 밀어내는 연민
분노와 싸우기는 어렵다. 분노한 사람은 “친한 사람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소리가 나면 짖어대는 개처럼”(아리스토텔레스) 행동한다. 눈먼 분노에 주변 사람들이 다치고 자기 자신마저 화를 입기 일쑤다.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그랬다. 친구의 죽음을 복수한 것으로 그의 분노는 풀리지 않았다. 그는 이미 신의 핏줄에서 태어난 영웅이 아니라 사나운 짐승으로 변해 있었다. 헥토르의 시신을 마차에 매달아 친구의 무덤 주위를 도는 것이 그의 화풀이였다. 멀리서 지켜보던 신들마저 혀를 찰 일이었으니, 아들의 시신 훼손을 성벽 위에서 지켜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거듭되는 반전은 ‘일리아스’ 읽기의 큰 매력이다. 친구가 적이 되는 것이 반전의 시작이라면, 적이 친구가 되는 것이 반전의 끝이다. 마지막 주인공은 바로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이었다. 늙은 왕은 한밤중 적진을 뚫고 살해자의 군막을 찾는다. 그리고 아킬레우스의 무릎을 잡고 두 손에 입 맞추며 시신 양도를 호소한다. “고향에 계신 아버지를 생각하시오.”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간절함에 아킬레우스의 돌덩이 같은 마음이 풀어진다. 다시 보지 못할 고향의 아버지와 아들의 살해자 앞에 무릎을 꿇은 아버지, 이미 죽은 헥토르와 곧 죽게 될 자신이 하나로 겹쳐진다. 적과 친구의 경계가 무너지고 인간에 대한 연민이 분노를 밀어낸다. “분노는 연민 속에 정화된다.”(바우라)
화낼 일들이 이어지는 분노사회
출애굽의 서사가 디아스포라의 삶을 산 유대인들을 하나로 묶었듯이 ‘일리아스’는 지중해와 에게해 주변에 흩어져 살던 그리스인들을 결속시킨 민족 서사시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서사시에서는 타자에 대한 적대감을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는 이 작품을 읽을 때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보다 적장 헥토르에게, 욕심쟁이 아가멤논보다 인내하는 프리아모스에게 더 큰 호감을 느낀다. 그러니 ‘일리아스’가 폭력과 전쟁의 서사, 명예를 추구하는 영웅들에 대한 찬사라는 평가는 얼마나 일면적인가? 이 작품이 적과 친구의 차이보다 더 부각시킨 것은 경쟁과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의 공통된 운명이다. “그렇게 신들은 비참한 인간들의 운명을 정해 놓으셨소. 괴로워하면서 살도록 말이오.” 아킬레우스는 이런 말로 프리아모스를 위로하며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준다.
인공지능(AI) 시대에는 청동기 시대의 마음이 달라졌을까? 더 많은 것을 갖게 된 지금 우리는 인정의 욕망과 분노의 감정에서 더 자유로운가? 경쟁과 다툼, 공정성 시비가 늘어난 만큼 분노할 일은 더 많아졌다. 우리의 삶 자체가 끝나지 않는 트로이아의 전쟁이다. 이 전쟁터에서 누구나 오늘 아가멤논이 되고, 내일 아킬레우스가 된다. 적과 친구의 관계도 급변한다. 분노가 훼손된 공정성에 대한 저항의 감정이라면, 이 감정 자체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생각 없는 분풀이가 분노할 일을 더 늘린다는 데 있다. 분노 사회에서는 화낼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래서 명예를 좇는 영웅들의 비극 ‘일리아스’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다. 호메로스는 그렇게 거친 세상을 향해 조용히 말을 건네는 것 같다. “누구도 분노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 ‘잘’ 분노하는 법을 찾으라.” “분노는 친구를 적으로 만들고, 연민과 공감은 적을 친구로 만든다.” “분노를 조장하는 자들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공동체의 파괴자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