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치러질 일본 중의원 총선을 앞두고 군마현 오타시는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유권자들이 투표할 때 사용한 연필을 가져가도록 했다. 이를 위해 시 당국은 유권자 수에 맞춰 연필 11만3000개를 주문했다. 시청 공무원들은 20일에 실시된 사전 선거에 쓰일 연필 1만 개를 깎았고, 31일까지 연필 10만3000개를 더 깎아야 한다. 바쁜 업무 시간에 공무원들이 모여 앉아 자동 연필깎이로 연필을 깎은 뒤 1개씩 보호 캡을 씌우는 진풍경이 TV를 통해 알려지자 “최첨단 시대에 행정 인력과 예산 낭비”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연필 구입에는 669만 엔(약 6800만 원)이 들었다.
▷시 당국은 이번 조치가 과거에 비해 훨씬 효율적이라고 주장한다. 올해 4월 시장 선거에선 유권자가 사용한 연필 1만 개를 하나씩 소독하느라 행정 인력이 더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엔 유권자들이 사용한 연필을 가져가도록 행정 개선을 했다는 것. 근본적 처방이 없으니 ‘오십보백보’다.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지는 것은 일본의 독특한 투표 방식 때문이다. 일본 공직선거법 46조는 ‘선거인은 투표용지에 후보자 1명의 이름을 자필로 써서 투표함에 넣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래서 후보자 이름을 직접 써야 한다. 볼펜 등을 쓰면 투표용지에 번질 우려가 있어서 연필을 주로 사용한다.
▷우리나라는 후보자나 정당 칸에 도장만 찍는 방식이어서 간단하지만 일본에선 철자가 한 획이라도 틀리면 무효 처리된다. 투표 방식이 어려우니 일본 정치인 이름 중에서 쓰기 쉬운 이치로(一朗), 다로(太郞) 등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래서 일본 선거에선 정책 공약보다 후보자 이름을 제대로 알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한다.
▷일본 관공서나 기업에서 도장을 사용하는 문화가 뿌리 깊은데도 유독 투표할 때만 도장을 사용 못하게 한 것도 특이하다. 유권자들이 직접 이름을 써야 하니 지나치게 번거롭다는 지적도 만만찮다. 이런 문제점을 인식한 일본 정부도 1994년 공직선거법을 개정해 투표용지에 도장을 찍는 ‘기호식’ 투표를 허용했지만 실제로는 도입되지 못했다. 한번 굳어진 관성을 쉽게 바꾸지 못하는 탓일 게다.
▷일본의 ‘아날로그’ 행정은 더 이상 뉴스가 아닐 정도다. 도쿄 올림픽 와중에 신속해야 할 코로나19 확진자 집계도 일일이 팩스로 처리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빈축을 샀다. 중의원 전체 465석을 새로 뽑는 이번 선거에서 과반인 233석 이상의 의석을 얻으면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는 재신임을 받게 된다. 기시다 내각이 출범하면 이런 낡은 구습부터 손질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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