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이라면 대개 신라 화가 솔거의 일화에 대해 들어보았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솔거가 황룡사 벽에 그린 노송도(老松圖)는 너무 진짜 같아서 까마귀, 솔개, 제비, 참새 같은 새들이 날아와 벽에 부딪혔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을 때, 화가 솔거보다는 머리를 벽에 쿵! 부딪힌 새를 생각한다.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아파트에 입주하려고 달려갔는데, 아파트 벽화에 머리를 찧은 것 같달까. 벽에 부딪힌 새들이 비틀거리며 떨어져 내렸다(蹭蹬而落)고 전하는데, 너무 당황스럽고 부끄러워서 수치사(羞恥死)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일화는 서양에도 있다. 플리니우스(Pliny the Elder)의 박물지(Naturalis Historia)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의 화가 제욱시스(Zeuxis)가 포도를 그리자, 새들이 진짜 포도인 줄 알고 달려들었다. 이 이야기를 들을 때도 화가 제욱시스보다는 입맛만 다시고 돌아서는 새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동서양 회화사에서 이 새들의 마음과 관점은 잊혀졌다. 새들이 느꼈을 창피함이나 난감함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러한 예화를 통해 천재 화가들의 묘사력만 칭송되어 왔다. 훌륭한 그림은 일단 묘사 대상을 실감나게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렇다면 기념비적인 성취는 단연 플랑드르 회화(flemish painting)다. 갓 쓰이기 시작한 유화의 장점을 활용하여, 로히어르 판데르 베이던이나 얀 반 에이크 같은 거장들은 눈앞에 대상이 어른거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실감나는 그림을 그려냈다. 얀 반 에이크의 대표작인 벨기에 성 바프 대성당의 제단화를 보라. 배경에 그려진 풀숲을 보다 보면, 그만 그곳에 달려가 눕고 싶어진다. 그 풀숲에 누우려고 돌진했다가 제단화를 감싸고 있는 유리벽에 부딪혀 비틀거리며 쓰러지는(蹭蹬而落) 사람을 상상해본다.
핍진한 묘사력을 과시한 사례는 유럽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당나라 멸망 후 송나라가 다시 서기까지 기간인 오대(五代) 시기에 활동한 서희(徐熙·885∼995년?)의 설죽도(雪竹圖)를 보라. 정교한 화훼화(花卉畵)를 잘 그렸던 것으로 알려진 이의 작품답게 이 설죽도의 대나무는 실제 대나무처럼 생생하다. 실로 이 그림은 중국 회화사에서 뛰어난 묘사력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로 거론되곤 한다. 서희는 이러한 그림을 과연 어떻게 그릴 수 있었을까? 정교하게 그리기 위해, 아마도 실제 대나무를 계속 관찰하고 모사하지 않았을까.
외부 대상을 실감나게 재현한 그림이라고 해서 늘 찬양만 받은 것은 아니다. 그 대단한 플랑드르 회화조차도 까다로운 감식가의 비판을 피해 가지는 못했다. 예컨대 17세기 후반에 활동한 작가 샤를 페로나 18세기의 화가 조슈아 레이놀즈와 같은 이들은 예술이 현실을 모사하는 데 급급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정치사상가 이사야 벌린에 따르면, 그런 사람들의 시각에서 보면 플랑드르 회화는 원래 존재할 필요가 없는 복제물을 세상에 하나 더한 것에 불과하다. 마치 실물처럼 그림을 잘 그렸으니 대단하지 않냐고? 진짜가 있는데 뭐 하러 구태여 진짜와 비슷한 것을 그리나?
11세기에 활동한 북송(北宋)의 문장가 소식(蘇軾)도 서희의 설죽도처럼 외부 대상의 모사에 치중한 그림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좋은 그림이란 외부 세계를 복제한 그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외부 세계를 무시하고, 그저 자기 느낌대로 휘저은 그림이 훌륭하다는 것도 아니다. 소식에 따르면, 탄력 있는 마음을 가지고 외부 대상을 창의적으로 소화한 다음에 비로소 그린 그림이야말로 훌륭한 작품이다.
그런 그림은 어떻게 그려야 할까? 눈앞의 대나무를 계속 관찰해가며 모사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그렇다고 대나무를 무시하라는 말도 아니다. 창의적인 것과 제멋대로인 것은 다르므로. 마음속에 하나의 대나무가 생겨날 때까지 대나무를 살펴보고 탐구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마음속에 대나무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대나무 그림을 그리려면 반드시 먼저 마음속에 대나무를 완성해야 한다(墨竹必先得成竹於胸中).” 대나무를 그린다는 것은 결국 외부에 있는 대나무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속의 대나무를 그리는 것이다.
일단 마음속에 대나무가 자리 잡으면, 빨리 그릴 수 있다. 일일이 외부의 대나무와 대조할 필요가 없다. 중심이 외부 세계가 아니라 탄력 있는 마음속에 있으므로, 외부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관점을 자유로이 이동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노송도 이야기를 솔거의 관점에서도, 새의 관점에서도, 혹은 벽의 관점에서도 읽을 수 있다. 그렇다고 소식의 그림이 제멋대로인 것은 아니다. 대나무를 그린다고 해 놓고 시금치나 쑥갓을 그리지는 않는다. 노송도 이야기를 하기로 해 놓고 노회찬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소식의 대나무 그림은 실제 어떤 모습일까? 오늘날 소식이 그린 대나무 그림을 실견하기는 극히 어렵다. 그나마 미국 보스턴 미술관에 가면,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소식의 작품이라고 여겼던 그림인 ‘절지묵죽도두방(折枝墨竹圖斗方)’을 볼 수 있다. ‘절지묵죽도두방’을 볼 때, 우리는 대나무를 보는 것일까, 대나무 그림을 보는 것일까, 대나무를 그린 이의 마음을 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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