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에 만든 ‘미몽’이라는 흑백영화를 본 적이 있다. 당시 ‘삼천만의 연인’이라 불리던 문예봉이 나오는데, 내용도 좋았지만 1930년대 경성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지금의 서울 북촌 가회동 일대는 주택 개발로 커다란 필지를 쪼개서 만든 도시형 한옥들이 들어서고 있었고, 주인공 부부는 그곳에 살고 있었다. 당시 주거 풍경과 더불어 부인이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호텔에 가서 맥주를 마시는 등 예상치 못했던 일상도 볼 수 있었다. 과거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공간을 만들고 살아왔는지 추측해 볼 수 있는 귀한 자료였다.
세상은 변한다. 사람도 변하고 사람이 사는 집도 많이 변한다. 집을 연구하는 것은 바로 시대를 연구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근대는 자의가 아니라 외세의 강요에 의해 어렵사리 몸을 맞춰야 했던 시간이었다. 의식주를 포함한 모든 것이 변했고, 도시로 사람이 몰리며 기존의 밀도와 사회적인 시스템을 재편해야 했다. 이후 광복과 6·25전쟁을 거치며 도시는 재건됐고 건축도, 주택 양식도 계속 변했다. 얼마 전 건축사협회지에서 1967년부터 지금까지 50여 년간 주택의 변화를 담은 기사를 봤다. 한국 현대 주거양식은 일본과 서양 건축의 영향 속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이어 산업화를 거치며 극심한 주택난을 해결하고자 극단적으로 내부지향적이고 외부와 유리된 건축 형식인 아파트가 주류로 떠오른다. 기사를 통하여 아파트로 인해 묻혔던 한국 현대 주거의 또 다른 갈래를 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1966년 완공된 ‘성북동 한씨 주택’은 연면적이 440m²나 되는 큰 집이다. 노출콘크리트와 붉은 벽돌로 마감한 전형적인 고급 주택인데 공사비를 평(약 3.3m²)당 15만 원이라고 적어 놓아 당시 물가를 어렴풋이 알 수 있다. 그리고 입식과 좌식 공간이 공존했는데 서양식으로 생활양식이 바뀌었어도 난방은 아궁이가 있는 온돌과 방열기를 겸해서 사용하는 집이 많았다.
전통에 대한 현대적 해석은 건축가들의 오랜 고민거리였다. 1971년 지어진 ‘손씨 주택’은 콘크리트 몸체에 돌을 붙이고 3층에는 한옥 형식을 융합하는 무척 실험적인 조형을 보여준다. 전통에 대한 표피적인 답습은 사실 많은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런 실험이 좀 더 진지하게 이뤄지고 깊이 연구됐더라면, 현대 주거건축이 전통과 이어지며 보다 진일보한 모습이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사실 1960, 70년대 대부분 현대 주거는 전통이 낡은 것으로 치부됐다. 이에서 완전히 탈피해 당시 수입되고 학습된 서양 현대건축 양식이 주를 이루었다. 1976년 건축가 공일곤이 서울 갈현동에 지은 소박한 집은, 이른바 3베이(방-거실-방 등 전면부에 3개 공간을 유치) 아파트 평면 구성과 비슷한 모습을 처음으로 보여준다. 아파트가 서서히 보급되던 시기였으니, 지금의 아파트 평면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발전됐는지 추측할 만했다. 과거에는 주로 3대가 함께 살았다면 이때부터 슬슬 부모와 자녀 위주로 구성원이 바뀌고 있어서 중산층 주택의 원형을 보는 듯했고, 마치 수없이 리바이벌된 노래의 원곡을 들을 때 느낌도 들었다.
1977년 건축가 홍순인이 설계한 ‘서교동 C씨 댁’은 전통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이 담긴 집이다. 이형의 까다로운 좁은 대지를 최대한 활용하고 높이차를 이용한 다양한 외부 공간 계획이 돋보인다. 당시만 해도 주택은 외부와 단절된 채 내부 위주로 계획되었는데, 홍순인의 주택에서 비로소 한옥에서처럼 내부 공간과 외부 공간이 서로 넘나드는 구성이 보이기 시작한다. 1983년 발표된 ‘박사장댁’은 한국성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하고 적용한 건축가 김수근의 작업이다. 변색 벽돌과 대형 유리를 사용해 시원한 매스(mass·덩어리)감을 보여주고, 툇마루는 그가 추구하는 전통 공간에 대한 고민을 드러낸다. 1993년에 발표된 승효상의 ‘수졸당’은 한국 현대 주거에 새 전환점을 던져준 작업이다. 수졸당은 작은 마당과 한식 담장 그리고 문방을 연상시키는 사랑채 배치 등 한국 건축의 요소를 아주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으로 배치했다.
필자 또한 한국성에 대한 해석을 담은 설계로 몇 채의 집을 설계했다. 2011년 완성한 ‘금산주택’은 마주한 산을 차경으로 끌어안고 안과 밖의 경계 없이 자연에 스며드는 풍경을 담은 집이다. 우리가 보기에 한국 건축의 가장 큰 특징은 일본이나 중국 건축과 달리 공간이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정지된 화면이 아니라 동영상처럼 공간과 공간 사이로 끊임없는 흐름이 있다. 빛과 바람 같은 자연의 요소들이 그 흐름을 따라 내·외부 공간에 담기게 되고, 가변적인 공간 구성은 서양 건축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사실 얼마 전까지도 한국 건축가들은 전통의 형태적 요소를 단순히 적용하는 것에 대해 부담감을 가졌고, 실제 적용한 사례도 마당이나 중성적인 공간 등 일부 개념에 한정된 채 정체돼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생활수준이나 문화, 예술 등 여러 가지 면에서 국가의 위상이 많이 높아졌다. 그동안은 선진국 기준에 맞추기 바빴지만, 이제는 우리 기준으로 우리 땅에 맞는 건축을 만들어갈 때라고 생각한다. 남의 시선이나 외부 평가를 의식하지 않고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생각을 확장해서 이제는 ‘지금, 여기’ 우리 몸에 맞는 현대 주거 양식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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