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반세기 넘게 적대시해 온 양국 간의 국교 정상화를 선언하면서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특별한 감사의 뜻을 전했다. 1년 반 넘게 진행된 양국 간 비밀협상이 막판 벽에 부딪쳤을 때, 프란치스코 교황은 두 정상에게 개인적 서한을 보내 중재자로 나섰고 양국 대표단을 바티칸으로 초청해 돌파구를 마련했다. 이듬해엔 쿠바와 미국을 연쇄 방문해 화해의 지속을 축원했다.
▷교황은 예수의 열두 사도 중 한 명인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수장이다. 성속(聖俗)의 권력을 아우르던 중세시대에 비하면 그 영향력은 크게 줄었지만 초국가적 권위에 바탕을 둔 교황의 스마트파워는 여전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주요 사안마다 교황이 내놓은 한마디 한마디의 울림과 무게는 남다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바티칸 교황청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을 예방한 자리에서 북한 방문을 거듭 요청한 것도 ‘하느님의 외교관’으로서 교황이 이뤄낼 수 있는 기적 같은 외교에 기대 보려는 안간힘일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북한이) 초청장을 보내주면 기꺼이 가겠다”고 답했다. 3년 전 답변 그대로다. 문 대통령은 2018년 9월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서 교황 방북 초청을 제안했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교황이 오시면 열렬히 환영하겠다”고 했다. 이에 문 대통령은 그 다음 달 교황청을 방문해 이런 뜻을 전했고, 교황은 그때도 “공식 초청장이 오면 갈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3년이 지나도록 북한은 바티칸에 초청장을 보내지 않고 있다.
▷북한도 한때 교황 방북을 추진한 적이 있다. 동구권이 우르르 무너지던 1991년 북한은 김일성 주석의 지시로 외무성에 교황 초청을 위한 상무조(TF)를 편성했다.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다급함에서였다. 북한 당국은 과거 독실했던 한 할머니 천주교 신자를 어렵사리 찾아내 바티칸에 데려가기도 했다. 교황청은 그 할머니의 눈빛만 보고도 오랫동안 마음속에만 품어온 진짜 신앙을 알아봤다. 하지만 정작 북한은 이 일을 계기로 종교의 ‘무서움’을 절감했고, 상무조는 두 달 만에 슬그머니 해체됐다.(태영호 ‘3층 서기실의 암호’)
▷교황 방북이 성사되려면 김정은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 소탈하고 거침없는 프란치스코 교황인 만큼 절차와 형식을 따지지 않는 파격 방북을 추진할 수도 있다지만 초청도 없이 갈 수는 없다. 김정은이 할아버지처럼 궁여지책으로 교황을 초청할 가능성도 없진 않다. 그러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냉전기 두 차례 폴란드 방문이 자유노조 결성과 공산정권 붕괴로 이어졌던 역사를 김정은이 모를까. 그 공포감부터 이겨내야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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