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PGA 200승’ 여자골프 비결은
어릴적부터 압도적인 훈련량
유망주 키워내는 경쟁시스템
《‘200.’ 여자 골프 세계 최고의 무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서 한국 선수들이 들어올린 우승 트로피 숫자다.
고 구옥희 프로가 1988년 스탠더드 레지스터 대회에서 첫 우승을 신고한 뒤 지난달 국내 유일의 LPGA투어 대회인 BMW 레이디스 챔피언십에서 고진영(26)이 우승하기까지 33년간 총 48명의 선수가 200승을 합작했다.
이는 개최국인 미국(1527승)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것이다.
48명 중 1승을 거둔 선수가 19명이나 될 정도로 특정 몇 명의 선수가 아닌 여러 선수들의 땀방울이 모여 만들어진 결과다.
세계 랭킹에서 한국 선수는 2일 현재 톱50에 15명이 있어 미국(11명)에 앞선다.
톱10에도 1위 고진영, 3위 박인비(33), 4위 김세영(28), 9위 김효주(26) 등 가장 많은 4명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불모지에 가까웠던 한국 여자 골프가 이처럼 전 세계를 호령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 황금 길 연 개척자 박세리
한국 여자 골프 발전의 기폭제 역할을 한 건 단연 박세리(44)다. 데뷔 시즌인 1998년 메이저대회 맥도널드 LPGA 챔피언십, US여자오픈을 포함해 4승을 따내며 국민 영웅이 됐다. 이런 활약에 제2의 박세리를 꿈꾸는 이른바 ‘세리 키즈’들이 쏟아졌다.
2016년 한국체육학회지(제55권 제1호)에 실린 ‘한국 여자 프로골프 선수의 LPGA투어 성공 요인’(임진택 외 2인)에서는 “박세리가 1990년대 후반 당시 외환위기로 신음하고 있던 국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골프에 대한 인식을 바꿔 놓았다. 더불어 골프가 돈과 명예를 한꺼번에 안겨줄 하나의 전문적인 직업이 될 수 있다는 의식이 생겨나면서 어린 선수들과 부모들이 ‘꿈의 무대’ LPGA투어 진출을 목표로 삼게 됐다”고 밝혔다.
스펜서 로빈슨 아시아골프산업협회(AGIF) 최고커뮤니케이션책임자 역시 “박세리가 젊은 한국 골퍼들을 위한 황금 길을 열었다”고 평했다.
○ 압도적인 훈련량과 체계적인 조기 교육
한국 여자 골프의 경쟁력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압도적인 훈련량이다. 한국 선수들은 골프를 통해 성공하겠다는 목적이 강한 만큼 어려서부터 고강도 훈련을 견뎌내고 있다. 2019년 LPGA투어 신인왕 이정은(25)은 중고교 시절 하루에 퍼트 연습만 12시간 이상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올 시즌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다승 선두(6승)인 박민지(23) 역시 중1 때 9홀짜리 파3 골프장을 하루에 7바퀴씩 돈 연습광으로 유명하다.
한국 여자 골프 선수 관련 블로그인 ‘서울 시스터스’를 운영하는 에릭 플레밍 씨는 한국 선수들의 경쟁력을 묻는 질문에 “누군가 카네기홀 무대에 어떻게 서느냐는 질문을 할 때와 답이 같다. 연습, 연습 또 연습(Practice, practice, practice)”이라고 설명했을 정도다. LPGA투어 대회 때 한국 선수들은 새벽에 연습장 불을 켜고 들어가 심야에 불을 끄고 나온다는 말이 있었다.
하늘의 별 따기에 비유되는 국가대표로 선발되기 위해선 학창 시절 대한골프협회(KGA)가 주관하는 전국대회에 출전해 좋은 성적을 거둬야 하는 만큼 많은 훈련량이 뒷받침돼야 한다. 하지만 미국뿐 아니라 유럽, 아시아 선수들도 이젠 한국 선수만큼 훈련을 한다. 공동묘지에서 담력을 키웠다거나 아파트 계단을 오르며 체력을 길렀다는 선배들의 사연은 이젠 전설이 돼버렸다.
요즘 한국 선수들은 중고교 시절부터 체계적인 관리를 받으며 스윙뿐 아니라 멘털, 체력 등 전문 코치에게 트레이닝을 받고 있다. LPGA투어 진출에 대비해 영어 교육까지 받으며 ‘빅 리그’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있다.
한국 특유의 이른바 ‘골프 대디’ 문화도 경쟁력에 한몫했다. 자녀의 뒷바라지를 위해 낯선 타지 생활을 감수하는 것은 물론이고 음식 장만과 차 운전, 때로는 매니저까지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부모 덕에 미국 무대에 연착륙하고 있다. 투어 통산 12승을 따낸 김세영 역시 성공의 열쇠로 “부모의 전폭적인 지지”를 꼽았을 정도다.
○ 탄탄한 국내 육성 시스템도 한몫
한국 선수들은 중고교 시절부터 국가대표가 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펼친다. 대한골프협회는 대회 성적에 따른 포인트로만 선수를 선발한 뒤 전폭적인 지원으로 실력을 키우게 한다. 세계 최강 한국 양궁처럼 공정성이 중요하게 작동한다. 신지애 최나연 박인비 등 용띠 스타들은 “중고교 시절 뛰어난 동기들이 너무 많아 스트레스도 받았지만 기량 향상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입을 모은다. 고진영과 김효주도 중고교 시절부터 라이벌 관계였다.
국내 KLPGA투어의 성장도 선수 경쟁력에 튼튼한 자양분 역할을 하고 있다. 20년 전인 2001년 16개 대회 총상금 27억 원으로 진행됐던 정규 투어는 올해 29개 대회 약 271억 원 규모(BMW 레이디스 챔피언십 200만 달러 포함)로 확대됐다. 더구나 정규 투어와 시메트라 투어(2부)로 이원화돼 있는 미국과 달리 한국은 드림투어(2부)에 점프투어(3부)까지 운영되면서 화수분처럼 해마다 스타들이 샘솟는 토양이 되고 있다.
세계 랭킹 20위인 제시카 코르다(미국)는 한국 선수들의 경쟁력에 대해 “우리 투어에 오기 전부터 그들은 이미 프로다. 우리가 ‘루키’라고 부르는 그들은 이미 10번의 우승 경험이 있는 선수들”이라고 평했다. 2015∼2019년 5년 연속 한국 선수가 LPGA투어 신인상을 연이어 수상한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여자 골프가 뛰어난 국제 경쟁력을 지닌 데다 인기가 높다 보니 기업마다 우수 선수 영입에 집중하고 있다. 어린 유망주들도 후원 계약에 따른 재정적인 안정을 통해 골프에만 집중할 수 있다. 올해 KLPGA투어 선수들을 후원하는 메인스폰서는 총 38곳이다. 최근에는 구매력 높은 팬들을 겨냥한 중소기업들의 후원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한국 여자 골프의 장밋빛 미래는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연희 전 골프 대표팀 감독(61)은 “과거 제한된 유망주 풀에서 선수들을 키워냈다면 골프 대중화 현상과 함께 골프에 도전하는 선수들이 더 다양해지고, 더욱 어려지고 있다. 과거 10년 주기로 재능 있는 선수들이 등장했다면 요새는 3, 4년으로 그 주기가 더 짧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과거에 비해 도전 의지가 약해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김재열 SBS 해설위원은 “국내 투어가 활성화되면서 LPGA투어에 도전하기보다는 국내 무대에 안주하려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박세리 박인비같이 최고 무대에 도전하는 선수가 계속 나와야 한국 골프도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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