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연인의 초상[이은화의 미술시간]〈187〉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1월 4일 03시 00분


크리스토파노 알로리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벤 유디트’, 1610∼1612년.
크리스토파노 알로리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벤 유디트’, 1610∼1612년.
황금빛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인이 목 잘린 남자의 머리채를 잡고 서 있다. 짙은 어둠 속에 감춰진 다른 손에는 칼이 들려 있고, 나이 든 하녀가 뒤에서 그녀를 보고 있다. 한눈에 봐도 그녀는 적장의 목을 베 조국을 구한 이스라엘 영웅 유디트다. 한데 그림 속 유디트는 용감한 영웅의 모습이 아니라 매혹적인 여인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게다가 살인한 사람의 표정치고는 너무도 담담해 보인다. 화가는 왜 이런 모습으로 그렸을까?

구약성경에 나오는 유디트 이야기는 참수라는 자극적인 소재에 애국적 메시지까지 담고 있어 수세기 동안 유럽 화가들 사이에서 인기리에 그려졌다. 17세기 피렌체에서 활동했던 화가 크리스토파노 알로리도 이 주제를 여러 번 반복해서 그렸다. 이른 나이에 메디치 가문의 궁정화가가 되었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그는 이 유디트 그림으로 단숨에 명성을 얻었다.

그림 속 모델은 화가 자신과 헤어진 연인 마리아 디 조반니 마차피리다. 두 사람의 연애는 뜨거웠지만 끝이 좋지 않았다. 절세미인이었던 마리아는 알로리의 돈을 많이 써서 끝내 그를 빈곤에 빠뜨렸다. 비참함에 못 견딘 알로리는 결국 관계를 청산했고, 그녀를 모델로 그린 성녀 초상화 두 점도 찢어 버렸다. 두 사람 사이가 틀어진 게 마리아의 모친 때문이라 생각했던 알로리는 살인의 조력자인 하녀 얼굴에 마리아의 엄마를 그려 넣었다.

실연의 상처가 너무 깊었던 걸까. 그림 속 알로리는 목이 잘린 채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이다. 여전히 아파하고 있다는 표시다. 반면, 고귀함을 상징하는 황금빛 드레스를 입은 마리아는 젊고 매혹적인 여성으로 묘사돼 있다. 옷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능숙하게 남자를 죽일 수 있는 대담한 여성이기도 하다. 알로리는 사랑했던 옛 연인을 결코 비난하고 싶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 대신 아름답고 고귀하고 담대한 여인의 모습으로 화폭에 새겨 죽을 때까지 간직했다.

#헤어진 연인#초상#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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