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11월 17일, 대표적 월간 문예지 ‘노비 미르’가 발간 하루 만에 전량 매진되는 이변이 발생했다. 거기 실린 어느 수학교사의 중편 덕분이었다. 그때까지 무명이었던 수학 선생은 1주일 후 소련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로 우뚝 올라섰고 얼마 후에는 전 세계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작가의 이름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1918∼2008). 중편의 제목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다. 소련 전역에 흩어져 있던 굴라크(GULAG·강제노동수용소)의 참상을 담담한 필치로 파헤친 이 소설로 작가는 197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솔제니친은 북캅카스 온천휴양지 키슬로보츠크에서 교사의 유복자로 태어나 로스토프대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붉은 군대에 입대해 포병장교로 복무하면서 두 번이나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1945년 2월 친구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스탈린을 가볍게 비방한 것이 검열에 걸리는 바람에 8년형을 언도받고 카자흐스탄 등지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형기를 채웠다. 스탈린 사후 시민권을 회복해 1957년부터는 모스크바에서 남동쪽으로 200km 떨어진 도시 랴잔에 정착해 중학교 수학 교사로 재직했다.
누구나 알지만 말할 수 없는 곳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일으킨 광풍의 일차적 원인은 소재 자체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말할 수 없고 말해서도 안 되는 굴라크의 면면이 소비에트 역사상 처음으로 활자화된 것이다. 굴라크는 1919년 소비에트 법령에서 출발해 스탈린 시대에 잔혹함의 극에 달한 ‘고문과 투옥과 살인’ 시스템으로 대략 2000만 명에 가까운 일반인과 범죄자, 정치범과 무고한 전쟁포로가 반인륜적 처우 속에서 장기 복역하거나 사망했다. 공산당 서기장 흐루쇼프는 자신이 주도하던 ‘스탈린 격하 운동’에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박차를 가하리라는 계산에서 정치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격적으로 출간 허가장에 서명했다. 그러나 1964년 흐루쇼프가 실각하자 솔제니친의 소련 내 위상도 바닥으로 추락했다. 특히 그가 1958년부터 당국의 눈을 피해 집필한 ‘수용소 군도’가 1973년 해외에서 먼저 출판되자 솔제니친은 하루아침에 ‘조국의 배신자’가 돼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이후 그는 ‘반체제’ ‘저항’ ‘양심’이라는 고결하지만 무겁고 거북한 메달을 목에 걸고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으며 체포와 국외추방, 미국 버몬트주에서의 칩거, 러시아 귀환으로 이어지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게걸쟁이’ 삶과 존엄함의 사이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의 주인공 이반은 평범한 농부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났다. 그리고 당시 수십만 귀환 포로에게 적용된 이른바 ‘간첩죄’에 걸려 영문도 모르는 채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다른 수많은 ‘간첩들’과 함께 굴라크로 이송된 그는 최소한의 방한복으로 영하 30도의 추위 속에서 중노동을 하며 3653일을 보냈다. 죄수에게 제공되는 급식은 하루 500g의 빵, 멀건 죽, 그리고 양배춧국이 전부였다.
죄수들이 굴욕과 자존심의 박탈 속에서 거의 짐승과 접경한 존재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 문제다. 그것이 또한 시스템의 의도이기도 하다. 그들은 오로지 “아침 식사시간 10분과 점심시간 5분, 그리고 저녁 식사시간 5분을 위해 산다”. 이런 상황에 처한 인간을 솔제니친은 세 부류로 나누어 묘사한다. 첫째, ‘게걸쟁이’다. 그들은 끼니 때마다 퇴식구 앞으로 몰려가 그릇에 남아 있는 국물 한 방울까지 핥아먹고 남의 빵을 훔쳐 먹고 부자 죄수에게 구걸을 하고 밀고를 하고 꽁초를 주워 피운다. 그들은 동료 죄수들 사이에서도 사람 취급을 못 받으며 수시로 두들겨 맞는다. 두 번째는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극소수의 사람들로 그들은 이빨이 다 빠져서 뼈처럼 굳은 잇몸으로 빵을 먹지만 결코 품격을 잃지 않고 죽 그릇에 얼굴을 처박지도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런 인간적인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의 얼굴에는 “산에서 캐낸 바위처럼 단단하고 거뭇거뭇한” 모종의 존엄함이 새겨져 있다.
주인공 이반은 양자 사이 어딘가에 존재한다. 이반도 대부분의 죄수처럼 하루 세 끼 밥 먹는 일에 목숨을 건다. 그에게도 “멀건 양배춧국 한 사발이 지금까지의 인생보다, 자유보다, 앞으로 남은 생애보다 훨씬 소중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사수해야 할 하한선은 넘지 않는다. 아무리 추워도 밥 먹을 때는 모자를 벗고, 국에 어쩌다가 들어 있는 생선뼈는 바닥에 함부로 뱉어내지 않는다. 남이 버린 꽁초는 주워 피우지 않는다. 부자 죄수가 소포를 받아 무언가를 먹을 때는 결코 그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는다. 이반은 “이빨도 반은 빠지고 머리숱도 얼마 안 남았지만 뇌물이라는 것을 주거나 받거나 한 적은 없고 밀고도 한 적이 없다”. 한마디로 그는 “추잡한 게걸쟁이로 전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소설의 클라이맥스에서 이반이 작업반원들과 벽돌 담장 쌓는 일에 몰입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하루해가 너무 짧다. 방금 작업을 시작한 것 같은데 벌써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니.” 초과 작업을 마친 그는 한 걸음 물러서서 자신이 쌓아 올린 담장을 감상한다. “내 일손도 아직 늙지 않았구나!” 지옥의 맨 밑바닥에도 한 줄기 햇살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다.
품격 잃지 않는 인간적 위엄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인간이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승리의 서사다. “수용소에서 죽는 인간이 있다면 그것은 남의 죽 그릇을 핥는 친구들, 뻔질나게 의무실에 드나들며 편히 누워 있을 궁리만 하는 친구들, 쓸데없이 간수장을 찾아다니는 친구들(밀고자들), 바로 이런 친구들뿐이지.” 이반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어떤 본성, 체면, 도리, 최소한의 염치와 품격을 지키면서 살아남는다. “신의 은총으로 이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살아남아야 한다!”
스웨덴 한림원은 “러시아 문학의 전통을 추구한 윤리적 힘”을 솔제니친의 노벨상 수상 선정 이유로 들었다. 솔제니친의 윤리적 힘은 탁월한 문학성과 결합해 이반과 같은 보통 사람의 내면에 있는 무한히 섬약한 동시에 무한히 강건한 인간적 위엄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위엄을 짓밟는 시스템은 악이라는 저 엄정한 사실을 그 어떤 기록문학보다 단호하게 고발했다. 훗날 평론가들이 그의 소설이야말로 장차 진행될 구소련 붕괴의 숨겨진 도화선이었다고 입을 모으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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